박윤주 (계명대학교 국제지역학부)
21세기에 유망한 직종들 중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의료·보건 관련 업종이다. 에볼라 바이러스, 신종플루 등 국제 뉴스에서 등장하는 보건의료 뉴스의 소식에서 이미 미래 인류가 대응해야할 보건의료의 과제들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예상을 쉽게 할 수 있다. 또한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구의 고령화 현상은 고령화된 인구를 돌보기 위한 의료보건시스템의 강화와 개혁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 또한 의료보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과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신흥개발국가들 중 의료보건지표의 개선을 이룬 성공적인 사례로 분류된다. 1980년대 68.8세였던 기대수명은 2005년 74.9세로 늘어났고 영아사망률은 37.8에서 16.5로 상당히 큰 감소폭을 기록하였다. 전염성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1980년에서 1984년 사이 기간에 평균 109를 기록한 것에 비하여 2000년에서 2004년 사이 기간에 55.9로 감소하였는데, 이는 1980년에는 59퍼센트에 불과하던 위생시설에의 접근성이 2005년에 84퍼센트로 높아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예방접종률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1980년 45퍼센트에 불과했던 DPT3의 예방접종률이 2005년에는 93.8퍼센트까지 높아졌다. 홍역 예방접종률도 역시 높아졌는데, 1980년 48퍼센트에 불과했던 홍역 예방접종률이 2005년에는 93퍼센트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들이 라틴아메리카 의료보건의 모든 문제들을 해소됐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평균적 개선’을 보여줄 뿐인 수치상의 성과는 각종 보건의료 지표 뒤에 숨겨진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내지 못한다. 의료 불평등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의료의 불평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역내 국가들 간의 의료 불평등이 두드러진다. 아르헨티나나 칠레와 같은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수준과 의료서비스의 질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에 비하여 카리브 지역의 국가들은 여전히 높은 영아 사망률과 낮은 기대수명을 경험하고 있다. 2014년 기준으로 아르헨티나의 기대수명은 77.5세인데 비하여 같은 해 아이티의 기대수명은 63.1세에 불과하다. 아르헨티나와 아이티 사이의 무려 14.4년의 기대수명 차이는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극단적 의료격차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일 뿐이다. 따라서 미주기구, 미주개발은행, 미주보건기구와 같은 국제기구들이 라틴아메리카 역내 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가 라틴아메리카의 의료분야에서 다양한 원조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 간의 의료격차가 라틴아메리카 보건의료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 중 하나라면,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 내의 의료불평등이다. 특히 사회적 소수자들, 즉 여성, 원주민, 빈민들의 보건현황을 살펴보면 소위 라틴아메리카에서 선두주자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의 국가에서도 의료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주민의 경우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 지역 인구의 7 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농촌 인구로는 40 퍼센트에 이른다. 원주민 그룹은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그 국가의 평균 수명보다 낮은 수명을, 평균 문맹률보다 높은 문맹률을, 그리고 평균 영아사망률보다 높은 영아사망률을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는 원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의료서비스로부터 소외되어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일례로, 멕시코의 경우 국가 평균 십만 명 당 96.3명의 의사를 보유하고 있으나, 원주민 인구가 40 퍼센트 이상인 지역에서는 십만 명 당 고작 13.8명의 의사가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일찍이 의료민영화를 실현한 칠레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의료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서비스의 일환으로 여겨지며, 의료정책이 의료산업으로 재규정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의 폭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칠레의 의료보험 민영화 이후, 여성들의 출산과 관련한 각종 의료보험비가 급등하고, 가난한 노년층들이 민간의료보험 시스템에서 퇴출당하였다. 이를 지켜본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의료개혁의 방향이 시장중심주의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파급될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의료 격차를 해소하고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 지출 증가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다양한 의료개혁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전통적인 신자유주의적이 아닌 새로운 형태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 그룹을 위한 맞춤형 정책들을 개발하였다. 원주민들을 위한 다문화주의적 의료서비스를 확대하거나, 모자보건의 개선을 위한 복지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고령화 시대를 대비하고 의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인 빈곤층을 흡수하기 위하여 전반적인 의료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는 기존 의료시스템을 확대하거나 개편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의료개혁의 노력은 라틴아메리카의 미래를 규정하는 중대한 변수이기도 하다. 역피라미드형의 인구구조가 일상이 될 미래에, 라틴아메리카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노년층을 돌보느냐는 단순한 의료보건의 문제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를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라틴아메리카가 추진하고 있는 다양한 의료개혁의 노력들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의료보건의 과제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서로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의 다양한 의료보건의 수요에 대하여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은 의료지출 방식을 효과적으로 개선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우리에게도 의료보건의 문제와 올바른 정책 방향을 위한 지속적 고민과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