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나(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미국의 유명한 록가수 Sting 은 “They dance alone” 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1987년 발표했다.
Hey Mr. Pinochet (이봐요 피노체트씨)
You've sown a bitter crop(당신은 증오의 씨를 뿌렸습니다.)
It's foreign money that supports you(당신은 유지하는 것은 외국의 돈이죠)
One day the money's going to stop(그러다 어느날 그 돈이 끊기게 되면)
No wages for your torturers (당신의 고문 기술자들은 임금을 못 받게 되고)
No budget for your guns(당신의 무기를 구입할 재정도 바닥날 것인데…)
1973년 아옌데 정권을 군사 쿠데타로 무너트린 피노체트 장군의 군사독재는 17년 만에 끝이 났다. 칠레의 피노체트 군부독재 정권과 어깨를 나란히 한 시카고 보이즈의 경제 관료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모범’적인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선보이며 그들만의 리그에 만족했고, 동시에 경제 성장과 근대화를 동일시 하던 개발주의자들은 강력한 정치권력의 당위성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학자 헌팅턴의 테제는 바로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실어 주면서 경제 성장을 위한 정치적 안정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냈다. 그는 개발도상국의 혼란스런 정치상황이 해결 되어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정치권력, 필요에 따라 군부에 의한 ‘질서’ 확립도 유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경제 성장의 ‘초석’을 다질 수 있다는 주장으로 그의 이론은 독재정권과 경제개발의 불필요한 상관 관계를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재정권과 경제개발의 함수 관계를 라틴아메리카 칠레의 경험을 통해 잠시 살펴보자.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당시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아옌데 정권을 집권 3년 만에 군사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납치와 고문을 동반한 신속한 정치 탄압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잠재적인 저항세력을 일소에 제거하고 수많은 희생자의 무덤 위에 철권 정치의 막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피노체트 정권이 추진한 경제 정책의 핵심은 ‘자유’ 였다. 이른바 ‘시장’의 자유를 우선하고 시장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최선이 되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도입이었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할 수 밖에 없는 국제적 질서는 이미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즉 피노체트 정권의 경제개발 노선은 ‘시장경제’의 우월성에 근거한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에 입각한 금융지구화가 만들어낸 자본의 유통구조의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쿠데타 성공은 이 후 칠레 경제가 미국의 영향력 아래 고스란히 놓일 수 밖에 없는 종속적 구조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미 1970년 대 중반 이후 당시 전 세계적으로 실물 경제 성장의 둔화와 함께 미국의 경제적. 금융적 헤게모니 붕괴는 국제 금융시장의 팽창을 가속화 했다. 1) 국제투기 자본의 가장 안전한 투자처는 헌팅턴의 테제처럼 강력한 정치권력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독재 정권일수록 투기 자본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데 그 이유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결코 사회적 저항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정책을 쉽게 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국가 역할을 최소한으로 줄여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등장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내용적으로는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수준의 국가 개입이 없었다면 불가한 정책이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도 칠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가장 이익을 본 집단은 실물경제, 즉 생산분야의 성장이나 아옌데 정권에 맞섰던 중산층도 아닌 국내외 금융 자본가들이었다는 것에서도 이 같은 사실은 극명하게 들어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팽창하기 시작한 국제금융시장은 한편으로는 실물 경제의 수익성 위기가 다른 한편으로 금융 영역에서의 투자로 이끌어 내는 결과2) 를 만들어 내면서 국제적으로 투기자본의 과잉이 나타났다. 더욱이 19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로 산유국들의 오일 달러의 유입은 이 같은 투기자본의 과잉 생산에 한 몫을 하였다.
다음은 1982년 라틴아메리카 외채 위기까지 칠레 피노체트 정권 당시(1976-1982) 해외 외채 증가 추이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다. 민간부문 외채는 1976년에서 1982년 사이 약 10배 이상 증가하면서 경제 성장률도 외채와 ‘비례’하여 높은 증가 추세를 보였다. 즉, 해외 외채 도입 및 해외 직접 투자와 동반 상승한 경제 성장률은 칠레의 지속적인 경제 개발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경제 “거품” 현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처럼 우려되었던 현실은 1982년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강타한 채무위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칠레 ‘기적’의 거시경제 성장률은 아옌데 정권을 군사 쿠데타로 무너트린 피노체트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기제로 작용하였으며 전 정권의 무능함과 실패한 사회주의로 각인시키는 ‘이데올로기’ 지표가 되었다. 피노체트 정권 시기 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은 심화되고 채무위기로 인해 국가가 부도 상태에 직면했던 1982년과 1984년 사이 상위 20%가 국가 수입의 60% 이상을 독점 하였으며 높은 실업률과 빈민층 또한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국민의 20%가 사회보장제도 등과 같은 사회복지 혜택을 61% 이상 받았으며, 하위 40% 의 국민은 오직 10.4%에 불과했다.
이 같은 사실은 칠레의 높은 경제성장률과 칠레 국민의 삶의 질은 무관하기도 보다 반비례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군부독재의 ‘정치적 안정’은 철권통치로 인한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의 결과였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이처럼 거시경제의 눈부신 성장은 심화된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극빈층의 증가라는 사회적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불가능 한 것이었으며,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강력한 정치적 탄압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었던 칠레 경제 ‘기적’의 실상이었다. 헌팅턴의 ‘정치적 안정’이라는 테제는 결국 ‘정치적 탄압’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개발’과 ‘독재’의 역설적인 관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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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춘권(2012),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 책세상.
2)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