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6:16:44 | 조회수 : 3,939 |
국가 : 중남미 | ||
조성훈(칠레대 사학과 박사과정) 1)
라틴아메리카 독립? 크리오요 식민주의! 우리는 보통 19세기 초에 라틴아메리카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게서 독립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시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두 왕국이 대서양 너머 넓디넓은 영토를 잃었고 그 지역에 새로운 독립 국가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얼핏 부정할 수 없는 진실처럼 보인다. 원주민과 흑인 같은 계층을 배제한, 사실상 크리오요 지배층만의 독립이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라틴아메리카 독립은 독립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자명한 상식”이 된 것은 우리가 두 가지 사실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첫째, 유럽 국가들이 멋대로 대륙 지도 위에 줄을 긋고 이름을 붙였다 해서 정말로 그곳을 모두 지배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현실의 이베리아 왕정들은 결코 뒷날 “아메리카”라 이름 붙인 땅 전체를 지배하지 못 했다. 애초에 에스파냐에 지배당하지도 않은 지역들이 에스파냐에서 “독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둘째, 선주민 중 수많은 사람들은 크리오요들이 세우려 한 국가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조차 않았다. 참여를 요구한 적도 없는 사람들을 놓고 단순히 “배제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때 그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라틴아메리카 독립”이라기보다는 크리오요 국민국가들의 건국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배제”라고 하는 일들 가운데에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원주민의 자치영역과 재산을 빼앗는 크리오요 식민주의가 있었다. 현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문제”(일제가 말하던 “조선 문제”란 말과 거북할 정도로 닮은 말이다.)는 그렇게 시작된 크리오요 식민주의의 문제를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그리고 현대 원주민 운동의 뿌리는 그러한 크리오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19세기 칠레 사회의 식민주의에 맞서 싸운 마푸체 지도자 마닌과 킬라판을 소개하려는 것은 크리오요 신생국가들의 건립을 “에스파냐 식민주의에서 해방”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그것이 억압의 출발점이었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에스파냐 제국의 귀환을 기다리던 마푸체 지도자, 마닌 1818년 2월, 독립군의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히긴스는 칠레가 에스파냐에서 독립했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아직 에스파냐 군을 완전히 무찌른 것은 아니었다. 에스파냐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칠레 중부에서 완패한 뒤로도 남부에서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갔다. 왕당파는 산티아고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그 지역 칠레인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긴긴 에스파냐 제국 시기를 거치면서도 끝내 독립을 유지한 마푸체 사회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다. 마푸체는 16세기부터 에스파냐 제국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제국의 행정력이 비오비오 강 남쪽으로 뻗치는 것을 막아온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칠레 독립을 요구한 크리오요 분리주의자들도 마푸체가 벌인 끈질긴 싸움에 감명을 받았는지 마푸체를 칭송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고, 자신들이 마푸체의 투쟁 전통을 이어받았다고까지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 마푸체가 에스파냐의 편에 선 것이다. 마닌도 에스파냐 편에 서서 칠레 공화국 군에 맞서 싸운 마푸체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왜 에스파냐를 도왔을까? 갑자기 에스파냐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미 17세기에 조약을 통해 형식상으로나마 마푸체의 독립을 인정한 에스파냐 정부보다 마푸체를 멋대로 “칠레 국민”으로 규정하고 앞선 마푸체와 맺은 조약들을 무시하는 칠레 공화국이 더 큰 위협이 될 것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푸체들 사이에서는 “타 윙카 타 크메이. 펜트렌 마푸 니에눈. 코피에르누 타 쿠니팔. 웨네이아눈 타문 마푸(에스파냐 쪽이 좋다. 에스파냐 인들에게는 땅이 많지 않나. 하지만 칠레 정부는 가난하다. 네 땅을 훔칠 것이다).”라는 말이 돌았다. 칠레 독립정부에 맞서 싸운 마푸체들의 걱정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해방자” 오히긴스만 해도 1819년 비오비오 강 북쪽에서 아직까지도 남아있던 원주민 공동체들의 토지를 빼앗는 조치를 실행했다. 말과 글로는 원주민을 존중하는 양 주장하던 독립운동파의 중요인물 카밀로 엔리케스 신부 역시 토지약탈을 거들었다. 현대 칠레 일각에서는 오히긴스보다 더한 독립영웅이라고 추켜세우는 라몬 프레이레 장군은 랍켄체 원주민 마을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때문인지 칠레 공화정부에 맞선 마푸체들의 싸움은 왕당파 칠레인들이 무기를 놓은 이후에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1835년까지도 칠레 정부는 협력을 거부하는 마푸체 집단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이후 싸움이 어느 정도 잦아든 다음에도 마닌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닌은 칠레 정부가 다스리는 도시로 찾아오라는 초대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지방세력 중 일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마푸체 땅이 전면 침공당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닌은 에스파냐 제국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1853년경에 마닌을 방문하고 여행기를 쓴 미국인 여행자 스미스는 “마닌은 특히 에스파냐 정부 상황에 대해서, 에스파냐가 칠레인들을 다시 정복할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사람들은 (칠레인들을 대할 때와는 반대로) 에스파냐 인들을 사랑한다. 이 사람들은 에스파냐 부왕이 에스파냐 왕의 뜻을 빠를라멘또(회의)를 통해 전하며 회의에 온 추장들을 트럼펫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며 맞이하고 선물을 베풀며 화평을 추구하던 그 시절이 돌아오기를 바란다. 칠레 공화국의 정책은 다르다. 공화국은 마푸체를 대할 때 경멸하는 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며 마푸체도 이를 모르고 넘어가지 않는다.”고 전한다. 마닌과 함께 칠레 공화군에 맞섰던 프란시스코 마릴루안이 1833년에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그 후손 페르민 마릴루안이 칠레 군대에 장교로 협조한 보람도 없이 페르민이 죽은 뒤 마릴루안 부족의 모든 땅이 칠레인들에게 빼앗기는 와중에도 마닌은 살아남았고 죽기 직전인 1860년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우르키사 장군과 칠레의 마누엘 몬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며 칠레인들의 침략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마푸체 민족(Nación)의 땅과 독립을 지킬 것임을 천명했다.
칠레 군대에 저항하다 죽은 마닌의 아들, 킬라판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닌은 죽기 전 아들들을 불러 "이트로 루멜 마이 케와예니아피문 타 푸 윙카. 펨놀문 타 냐무피문 타문 마푸(칠레 놈들과 싸우기를 한시도 멈추지 마라. 싸움을 멈추면 우리 땅을 잃게 될 것이다.")는 유언을 남겼다. 마푸체는 이미 땅을 잃고 있었다. 칠레인들은 마푸체를 "똑같은 권리를 지닌 시민"으로 인정한 뒤 마푸체들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얻은 "다른 시민에게 땅을 팔 권리"를 마음껏 이용하여 토지를 약탈하고 있었다. 콜리피 집안을 비롯한 일부 마푸체 지도자들도 칠레 민병대의 지원으로 부족 내에서 자기 권력을 강화하며 식민화에 협력했다. 마푸체 영토에 칠레 법을 강요하며 온갖 편법과 사기로 마푸체의 땅을 강탈했다. 결국 1859년, 칠레의 내전을 틈타 마푸체들이 칠레인 식민자들을 모조리 쫓아내는 일이 벌어지자 칠레 정부는 식민화를 위해 더 적극 나서기로 결정했고 마푸체 영토 더 깊숙한 곳에까지 식민자들을 지키기 위한 요새를 세우기 시작했다. 많은 마푸체가 전쟁을 두려워 해 저항을 마음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킬라판은 필사의 힘으로 칠레에 맞설 동맹을 찾았다. 프랑스인 모험가를 왕으로 받들어 프랑스 군의 도움을 받으려 해 보기도 했고 아르헨티나 쪽에 있던 마푸체 지도자인 칼푸쿠라의 힘을 빌리려 하기도 하였다. 칼푸쿠라 또한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팜파와 파타고니아의 원주민 영토를 빼앗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식민자들이 지닌 무기는 옛날 에스파냐에서 온 정복자들이 쓰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킬라판도 몇 차례 협상을 시도해 보았으나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조건들 말고는 내놓지 않는 칠레 정부와 의견을 맞추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몰려오는 칠레인 식민자들이 저지르는 약탈과 살인을 그냥 참아내기도 어려웠다. 이들은 마푸체의 게릴라식 저항을 무너뜨리려 집에 불을 지르고 농작물을 망쳐 놓았다. 어떻게 해도 칠레 군을 막아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쫓기던 킬라판은 1881년 마푸체 땅 한복판에 테무코 시가 들어설 무렵 숨을 거둔다. 킬라판은 죽을 때까지 주변 마푸체들에게 저항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그해 말, 거의 모든 마푸체 부족들이 칠레 식민자들의 침공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 대대로 칠레 정부에 협력해 온 마푸체 부족들마저도 대다수가 칠레인들에 맞서기로 결정할 만큼 칠레 식민자들의 토지약탈과 횡포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푸타 말론(대 전쟁)이라고도 하는 이 사건 역시 마푸체들의 패배로 끝났다. 마닌의 예언대로 칠레인들은 마푸체 토지를 약탈했고, 칠레 정부는 유럽에서 데려온 식민자들에게 마푸체 아이를 몸종으로 나누어 주었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다른 여러 공화국들도 비슷한 일을 벌였고 이로서 마푸체와 다른 여러 원주민들의 영토는 "라틴아메리카"에 통합되었다.
식민주의에 맞선 저항의 선구자들 한국사회가 라틴아메리카에 품은 이미지 중 꽤나 많은 호응을 얻은 것들로 "수탈된 대지", "저항의 대륙" 따위가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에스파냐 식민주의의 유산이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고 거기다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 간섭으로 신음하는 곳이라는 피해자 이미지 말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아주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500년 동안 "수탈된 대지"로만 남는 곳 따위는 없다.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이 다른 한 집단에 대해서는 피해자면서 또 다른 한 집단에 대해서는 가해자일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며 라틴아메리카라는 발명된 대륙 또한 예외가 아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원주민들에게는 충분히 가해자였으며 이를 모두 에스파냐가 남긴 "악영향" 때문이라 할 수는 없다. 에스파냐 왕이 약속한 원주민 공동체의 권리마저 무시하던 라틴아메리카는 충분히 주체적인 가해자였다.
존 찰스 채스틴은 『아메리카노: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에서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가장 큰 공헌은 탈(脫) 식민 세계의 인민주권 확립이라 하였다. 채스틴도 인민주권의 원리를 차마 대놓고 거부할 순 없어도 결과는 피하고 싶어 했던 이들이 "대중은 민주주의에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민주권을 유예하는 전술을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는 점은 지적한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인민주권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서양의 식민통치가 막바지에 다다르던 1945년에 전 세계적 탈식민화의 최우선 원칙으로 명시되었다고 하며 라틴아메리카의 공헌을 강조한다. 기괴한 주장이다. 탈(脫) 식민 세계의 인민주권을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사들 내세운 자들이 세계에 보여준 것은 식민주의이자 비유럽 문화집단의 주권 말살이었지 탈(脫) 식민 세계의 인민주권 확립이라 볼 순 없다. 오히려 마닌과 킬라판이 한 것처럼 그러한 위선에 맞선 싸움이 진정한 인민주권을 위한 싸움의 출발점이었다 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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