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6:16:18 조회수 : 2,702
국가 : 우루과이


 

임주인(前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갈레아노(Eduardo Galeano Cesar Montes 1940-)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상류계급에 속하는 가톨릭 신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에두아르도 후게스 루센(Eduardo Hughes Roosen)이고 어머니는 리시아 에스더 갈레아노 무뇨스(Licia Esther Galeano Munoz)로 이들의 이름에서 드러나듯 갈레아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독일과 영국 웨일스인의 혈통이 골고루 이어받았다.

  갈레아노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을 뿐 아니라, 화가, 타이피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통해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14세 때 사회주의 당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엘 솔(El Sol)>에 정치를 풍자한 자신의 첫 번째 캐리커처를 싣기도 했다.

   갈레아노는 60년대 말 과테말라의 한 밀림에서 게릴라요원인 세사르 몬테스(Cesar Montes)를 인터뷰하면서 주간지 <행진(Marcha)>의 편집자이자 기자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된다. <행진>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마누엘 말도나도(Manuel Maldonado), 데니스 이 로베르토 페르난데스 레타마르(Denis y Roberto Fernandez Retamar), 마리오 베네데티(Mario Benedetti)와 같은 인물들이 함께 참여하는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갈레아노는 이 신문 외에도 2년 동안 일간지 <시대(Epoca)>를 발간했다. 그는 실비아 브란도(Silvia Brando)와의 사이에 딸 베로니카(Veronica Hughes Brando)를 두었고 가르시엘라 베로 로비라(Graciela Berro Rovira)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지금은 그의 세 번째 부인 엘레나(Helena Villagra)와 살고 있다.

  그가 파리에서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하는 동안,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을 알게 되었다. 갈레아노는 집요하게 그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고 정확하지도 않은 전화번호를 들고 그를 찾으러 여행을 떠날 정도로 페론에 대한 집착이 컸다. 다행스럽게도 그를 만날 수 있었고 예상외로 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갈레아노가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그의 계획에 대해 물어보자, 페론은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섭리를 숨김으로써 신적 권위를 보여준다"는 대답으로 대신했다. 1973년 6월 27일 우루과이 쿠데타에서 갈레아노는 체포당하고 우루과이에서 추방된다. 그의 작품 <라틴 아메리카의 노출된 혈관들(Las venas abiertas de America Latina)>은 미국에서 비평적 관심을 집중시킨 첫 번째 번역서로서 미국과 유럽에 의해 자행된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적, 정치적인 착취에 대한 역사서이다. 그는 이 책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빈곤과 환경파괴, 그리고 정부의 전제정치의 원류를 추적한다. 식민지 시대 이래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생했던 잔혹성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갈레아노의 결단력으로 인해 이 책은 식민지 지배와 착취을 비판하는 좌파세력 사이에서는 교과서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의 노출된 혈관들>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그리고 칠레의 군부독재에 의해서 출판을 금지당한다. 그러나 2009년 4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Hugo Chavez) 대통령이 미주기구 회원국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에게 <라틴 아메리카의 노출된 혈관들>을 건네주었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그의 책이 갖는 영향력은 컸다. 이후 갈레아노는 아르헨티나로 가서 <위기(Crisis)>라는 문화관련 잡지를 창간한다. 이 잡지는 서반아어로 발행된 그 어떤 간행물보다 최대한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1976년 갈레아노가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할 즈음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Jorge Rafael Videla)의 죽음에 관여한 이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있음을 알고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는 그곳에서 1984년, 대표작인 <불의 기억(Memoria del fuego)> 삼부작을 펴낸다. 이 작품에서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간추리면서 역사적 연대기를 생산해내기보다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사적이고 감정이입적인 면면까지 파헤친다. 그는 북미와 중미, 남미의 역사를 사실과 허구, 신화를 뒤섞어 소개하면서 유럽화된 가치의 이상화로 인하여 격하되고 잊혀져간 토착화된 라틴 아메리카 문화 유산을 복원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나는 객관적인 작품을 쓰기를 원치 않았을 뿐 더러 원할 수도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런 역사적 서술에는 중립적인 것은 없다. 내 자신을 멀리할 수 없기에 나는 곁가지를 택한다"고 고백한다.

  1985년 초 그는 몬테비데오로 돌아오게 되고 그해 10월에 <행진>의 편집자들과 다시 만나<균열(Brecha)>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한다. 2010년에 '불의 추억'이라는 상을 만들어 인권과 사회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이들에게 수여하게 된다. '불의 추억'의 첫 번째 수상자로 자작곡 가수로 알려져 있는 스페인 출신의 호안 마누엘 세랏(Joan Manuel Serrat)이 수상했다. 갈레아노는 여전히 타릭 알리(Tariq Ali)와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Adolfo Perez Esquivel)과 같은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과 계속 교류하면서 이들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방송 네트워크 텔레수르(TeleSUR)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2008년 11월, 갈레아노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의 승리를 예견하면서 "백악관은 버락 오바마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백악관은 흑인 노예들에 의해서 건립되었고 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그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 인터뷰에서 "미국과 유럽은 전 세계에 독재정치의 씨앗을 뿌려놓고 도리어 민주주의를 운운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010년, 갈레아노는 그 동안의 언론 및 창작 활동을 통해 언어의 자유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문화 상호간의 이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스웨덴으로부터 다게르만(Stig Dagerman)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시와 산문, 그리고 칼럼을 통해서 자신의 증언을 전달하기 위해 정형을 벗어나는 형태의 언어를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갈레아노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등 사실주의에 환상을 융합시킨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기법을 이어받아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복원시키고자 시도하면서 이 지역 신화들과 구술전통을 반영하는 어휘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언어는 박물관 안에 갇혀있는 역사를 구제해낼 수 있는 자유로운 것이어야 하고 모든 차원을 포용할 수 있는 정열적인 이성, 이성적인 정열을 감싸 안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에는 <사랑과 전쟁의 낮과 밤(Dias y noches de amor y de guerra)>(1978)과 <바람의 세기(El siglo del viento)>(1986) 그리고 <주유천하(Vagamundo)>(1973) 등이 있다. 갈레아노의 이러한 작품들은 서구화로 인해 억제되고 오역되어 온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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