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6:17:10 | 조회수 : 2,772 |
국가 : 브라질 | ||
임두빈(前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일생 질베르뚜 프레이리(이후 '프레이리')1900년 3월 15일 브라질 헤시피(Recife) 출생으로 사회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작가이자 화가로 활동했으며 20세기에 활동한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들 중의 일인으로 꼽힌다. 그는 초등학교와 중등교육과정(1908-1917)을 헤시피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서 받았다. 이후 191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Baylor대학에서 사회정치학을 공부하고, Colombia 대학에서 정치학, 법학, 사회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당시 프란츠 보아스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19세기 중반 브라질에서의 사회적 삶"이었다. 그는 학위 공부를 마친 후에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 한 뒤에 1923년에 브라질로 귀국하여 도심이 더 발전된 남동부 쪽으로 가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페르남부꾸주(pernambuco)의 헤시피(Recife)에 정착을 하여 1986년에 페르남부꾸주 한림원의 23번째 좌석을 차지했고 학자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정치가로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영유하다가 1987년 7월 18일에 자신의 고향에서 운명을 거두었다. 브라질 민족형성에 대한 연구 프레이리는 브라질에서 사회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1922년에 상파울루에서 모더니즘 운동으로 시작된 "문화예술주간"(A Semana de Arte Moderna)에 반하여, 북동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상파울루 중심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기반으로 브라질 안에서 재현되는 서구유럽문화에 대항하는 브라질 북동부의 전통적인 지역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을 취했다. 1933년에는 필생의 역작인 <대저택과 노예숙사>(Casa grande & Senzala)를 출판하였고 그 책은 후에 여러 나라에서 다시 발행되었다: 아르헨티나(1942), 미국(1946), 프랑스(1952), 포르투갈(1957), 독일과 이탈리아(1965), 베네수엘라(1977), 헝가리와 폴란드(1985), etc. <대저택과 노예숙사>(1933)외에도 브라질 민족사회형성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논하는 저작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브라질 민족정체성의 문제는 과거뿐만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부분이다. 유럽지배에 있었던 식민지배의 역사와 상대적으로 짧은 근대국가의 역사로 말미암아 문화와 민족 정체성의 문제는 그 누구보다도 브라질 사람들 자신부터 항상 화두가 된다.
이처럼 브라질 민족정체성 문제는 끊임없이 성찰되는 주제였기 때문에 그것을 형식화 할 이론화의 필요성이 줄곧 대두되었고,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질베르또 프레이리는 현대 사회과학과 전통적인 문예사조 방법론과 결합시킨 사회분석의 혼성적인 접근법을 재현하였다. 그는 브라질 문화적 실체의 본연이 식민시기에 북동부에 자리 잡게 된 설탕 제당소(Engenho)를 보유한 사탕수수 대농장(fazenda)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대농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삶의 터전이었던 <대저택>과 <노예숙사>가 점차적으로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브라질 전역으로 퍼져가서 도시형성에 이바지 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브라질 민족주의자의 모습과, 동시에 포르투갈이 남긴 식민지배 유산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는 특히 식민지 시기 사탕수수 대농장을 근간으로 한 북동부 지역의 가부장제적인 전통과 체제에서 브라질 민족 형성의 기원을 찾았다. 그는 <대저택과 노예숙사>를 통해 당시 브라질에서 점차 늘어가는 혼혈현상을 당대의 시각이었던 민족 퇴보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인 해석을 수행한 기원적인 학자로 기억된다. 물론 그도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대저택과 노예숙사>의 부제인 '가부장제적 경제 체제아래에서 브라질 가족의 형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프레이리는 이 책을 통해 19세기 브라질 민족형성에 어떤 구성원들이 어떻게 참여되었는지, 외부에서 유입된 문화가 당시 브라질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음식, 언어, 옷, 종교와 애정의 표현과 성생활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의 모습들을 기술하였다. 그는 특히 브라질이 식민시대에 형성되었던 가부장적인 가족관계와 혼혈(mesticagem)을 통해 피부색이 다른 인종끼리 혈연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환경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프레이리는 <대저택과 노예숙사>의 제1장과 또 다른 그의 저작 <포르투갈 땅에서의 브라질인>("Um Brasileiro em Terras Portuguesas(1953)"을 통해 '루주 트로피칼리즘(Luso-tropicalismo), 즉 열대지방에서의 포르투갈 사람들의 적응력에 대한 강조를 하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분리주의'를 채택했던 다른 식민지배 사회보다도 브라질에서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나 대립이 상대적으로 더 쉽게 용해될 수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인종적 민주주의' 가설은 브라질 역사 전반에 걸쳐, 특히 민족주의를 기치로 국가통합을 주도했던 바르가스 정권과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통치이데올로기로써 적극적으로 활용된 바 있다. 물론 포르투갈인 식민지배자의 계층적 우위와 노예제에 준거한 '비판 의식이 결여된 체제 순응주의'라는 혹독한 비판도 받지만, 민족 정체성을 다루는 저자와 연구자들이 주로 전통적이고 공식적인 것에 주목하여 항상 경험하는 일상 영역을 무시해 온 경향에 비춰보았을 때 1930년도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일상을 중심으로 사회를 분석하는 선구자적인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19세기 유럽과 브라질 지식인들이 '과학적'이라는 미명아래 우생학적 논리로 브라질 민족이 지녔던 패배주의적 시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프레이리가 보여준 연구 방법의 특징은 브라질 사회문제를 당대의 패러다임이었던 '인종적' 관점이 아닌 각 집단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에 의해 구성되는 '문화'라는 프리즘을 통한 접근이었다. 프레이리는 브라질이 자신의 역사를 뒤돌아 볼 때, 응구기의 표현대로 '문화폭탄'의 효과로써 애써 망각하고 싶은, 스스로 거리를 두고 싶어 하게 만드는 과거인 노예제도를 '조화로운 대립'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긍정적인 자기 것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훌륭한 전략가로 평가해 볼 수 있다. 가려진 부분 프레이리는 한때 침례교 신자였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인 침례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 물론 그가 어릴 때부터 브라질에서 미국인 학교를 다녔고 석박사를 미국에서 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다지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가톨릭 전통이 우세한 브라질 사회를 해부한 사회학자로서 종교가 그의 인생관과 세상을 보는 시각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증빙이라도 하듯 그가 개신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본인 스스로도 잘 밝히지 않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이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33년<대저택과 노예숙사>를 출간하면서 프레이리는 브라질 지식사회에 하나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 당시 국가적인 문제로까지 치부되던 혼혈인들을 옹호하고 그들이야말로 브라질 민족이 가진 긍정적인 특성의 일부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대저택과 노예숙사>는 브라질 사회뿐만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도 큰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사실 프레이리 역시 당시 1920년대에 브라질 지식인 사회에 팽배했던 브라질 민족의 점진적인 백인화 시나리오에 동참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처럼 브라질 국민의 피부색을 희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올리베이라 비아나(Oliveira Viana)의 "Na Argentina"라는 책 서문에 "우리는 남쪽 이웃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라는 서문을 쓰기도 했다. 또한 1925년 페르남부꾸 일간지에 "흑인피를 통한 오염"이라는 '인종차별적인' 기사를 게재한 적도 있다. 1922년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발표한 석사논문 "19세기 중반 브라질의 사회적 삶"에서 당시 미국에서 흑인노예들을 처형하는데 악명을 떨쳤던 Ku Klux Klan americana, 즉 KKK단의 행위를 옹호하는 부분이 실렸지만, 1964년에 해당 논문의 재출판 과정을 통해 그 부분을 삭제한 바 있다. 사실, 그가 KKK단을 옹호했던 사실은 해석하는 시각의 차이이겠지만 <대저택과 노예숙사>에서 보여준 그의 생각과 무관하지는 않다. 실제로 프레이리는 미국 북부의 공업화 노선에 방향을 내주게 된 남부 전원사회의 낭만과 여유로움을 아쉬워했다. 그런 관점에서는 미국 남부 사회의 노동력의 근간이었던 흑인노예들의 고통은 그에 있어서 부차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미국사회를 보는 그의 이러한 관점은 브라질의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 운동에 대항한 북동부 지역주의의 가치를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브라질 역시 남동부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은 유럽으로부터 이식된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미래가치로 삼고 있었고, 북동부에서 일어난 지역주의는 기존 체제를 바탕으로 한 '전통과 기존 체제의 유지'가 핵심이었던 것이다. |
이전글 | 마닌과 킬라판, 크리오요 식민주의에 맞선 원주민 영웅들 |
---|---|
다음글 | "침묵하지 마시오, 저항은 당신들의 권리입니다"-멕시코의 철학자 루이스 비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