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6:11:54 | 조회수 : 1,476 |
국가 : 브라질 | ||
임두빈 (前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2002년 브라질 역사상 최대의 이변이 일어났다. 노동당(PT)소속의 룰라가 네 번의 도전 끝에 집권당인 사회민주당(PSDB)의 후보 주제세하(José Serra)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집권1기에 측근 비리에 휘말려 정치적 위기에 몰리는 듯 했지만 2006년에 다시 사회민주당의 후보 제랄두알키민(Geraldo Alkimin)을 누르고 다시 재선에 성공했다. 8년에 거친 집권기에 룰라는 경제성장, 빈곤층 감소, 일자리 증대, 국제적 위상강화 등 임기 말까지 지지율 80%를 자랑하는 ‘브라질 굴기’의 초석을 굳건히 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2010년 10월 대선을 통해 룰라의 정책을 이어받아 ‘브라질 굴기’ 제2막을 지휘할 새 대통령이 선출됐다. 지우마호세피 대통령(62)는 남미의 종주국에서 배출된 첫 여성 대통령이다. 남성우월주의 경향이 강한 라틴아메리카의 대국 브라질에서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여성이 대통령이 된 것은 가히 혁신적인 일로 여겨진다. 이처럼 브라질은 지난 8년간 경제성장 외에 민주정치의 선진화라는 성과를 낳았다. 호세피 대통령은 1947년생으로 브라질 남동부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주 벨로오리존찌(Belo Horizonte)에서 불가리아계 이민자 후손 가정의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군사독재정권(1964~1985년)시절, 당시 나이 16살부터 반정부 무장투쟁 조직(노동자정파(POLOP)와 전국해방지휘본주(COLINA))에서 활동했고, 1970년 당국에 체포돼 3년간 수감생활을 하며 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진1> 게릴라활동 당시 사진 <사진2> 정무장관 시절 호세피 대통령 이번 대선 기간 동안 야당이 그의 과거 행적을 들먹이며 ‘테러리스트’, ‘게릴라’라고 흑색선전을 했지만 그가 반정부 활동에서 실제로 맡았던 역할은 집회 참석, 회계 등 조직운영에 관한 부분으로 ‘게릴라’라는 이미지는 과도한 정치공세로 평가되었다. 출감 후에 최남부에 위치한 히우그란데두술(Rio Grande do Sul)주 연방대학(UFRGS)3) 경제학과를 1977년 졸업했으며, 상파울루(São Paulo)주 깜삐나스(CAmpinas)시 소재 주립대학인 우니깜삐(Unicamp)에서 경제통화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에는 포르뚜알레그리(Porto Alegre)시에서 민주노동당(PDT) 창당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86년부터 2002년까지 시 재무국장과 주정부 에너지부 장관을 맡아 행정 관료의 틀을 잡았다. 2001년 노동자당(PT)으로 옮겼고 2002년 브라질 대선에서 룰라 캠프에서 에너지 정책을 맡았고 룰라 당선 후 2003년에 연방정부 에너지장관에 임명됐다. 재직당시 강력한 조직 장악력과 공격적인 업무스타일로 주변 동료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올해 1월1일부터 대통령 직무를 시작한 그는 점심도 집무실에서 해결한다고 한다. 추진력이 강한 대통령의 일처리 스타일에 맞춰 관계 장관들 역시 도시락을 준비해 와 대통령의 호출이 오면 집무실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회의를 진행한다고 한다. 이런 변화를 바라볼 때, 우리야말로 일반적으로 우리 머릿속에 떠올리는 ‘남미 스타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떨쳐야 할 것 같다. 관료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호세피가 대중 앞에 부각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2005년 재선을 판가름하는 대선을 1년 앞두고 야당의원 매수사건이 터져 룰라정부가 최대 위기에 빠졌던 시기이다. 룰라대통령의 최측근 주제디리세우(José Dirceu)정무장관이 사임하게 되면서 호세피가 구원투수로 나서게 되었고 2006년 룰라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차기 대선주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브라질판 뉴딜 정책인 ‘경제성장촉진프로그램’(PAC)의 입안과 가동을 호세피가 주관하여 룰라대통령으로부터 ‘브라질 경제 성장의 어머니’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차기대선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호세피 대통령의 이미지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도수 있는 안경을 쓰고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는 행정 관료의 이미지가 훨씬 강했다. 본격적으로 대선 주자가 되기 위해서 이미지 변신을 꽤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착용했고 보톡스 시술까지 받으면서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추고 쉬운 어법을 사용하여 대중에게 다가서는 노력을 기울였다. 림프종으로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 가발을 벗어 흔드는 모습이 브라질 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기도 했다.
<사진3> 가발을 벗고 나타난 호세피 대선주자 <사진4> 대선후보 이미지로 변신한 호세피
<사진5> 호세피 대선주자 선거유세에 팔 벗고 나선 룰라 <사진6> 2011년 1월1일 정권이양 룰라 대통령의 행보에 호세피가 함께 했고, 룰라의 뒤를 이어 호세피대통령이 당선되었다. 2002년~2010년간 8년에 달하는 집권이 끝나는 시점까지 룰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80% 이상에 육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호세피 대통령이 대선주자였던 상황에서 결정적인 도움으로 작용했지만 2011년 1월1일 정권을 이양 받은 현직 대통령의 입장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전 대통령의 카리스마가 워낙 강해 향후 국정 운영에 있어 잘해도 룰라의 후광, 못하면 호세피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평가될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새 대통령이 국정을 잡자마자 4년 뒤 룰라의 대선 출마까지 등장했을까. 그러나 최근 대 이란 외교에서 룰라 정부와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하는 등, 호세피 대통령도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내세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우마호세피 대통령의 최측근 지우마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은 유년기 시절 친구인 소니아 마세두(Sonia Macedo)이다. 그녀는 대선운동 당시 지우마의 지지자 블로그를 맡았던 인물이다. 당선이후에도 변함없이 대통령의 (비공식적인) 자문역할을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우리 관념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겠지만 두 번째 전 남편인 까를로스아라우주(Carlos Araújo)로 호세피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소수 인물 중의 하나이다. 호세피는 1969년 전국해방지휘본부가 리우데자네이루로 본거지를 옮겼을 당시 변호사였던 두 번째 전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이 부부는 지난 2000년에 결국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들 사이에 태어난 외동딸에게 손자가 탄생하면서 비록 이혼한 사이이지만 전 남편과의 가족관계가 더 친밀해질 것으로 현지 소식통은 전하고 있다.
2) D ilma 를 국내에서 ‘딜마’ 혹은 ‘지우마’로 표기하고 있다. 딱히 구분한다면 ‘딜마’표기가 영어식 표기에 더 가깝고 외래어 표기상 더 친숙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영어식 기준을 탈파하여실제 현지발음을 최대한 반영하여 현지정보를 더 친숙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지우마’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그리고 사람이름과 지명은 포르투갈어 외래어 표기법(2005년 국립국어원 발간)에 따라 붙여서 표기한다(예: 지우마 호세피-> 지우마호세피/ 미나스 제라이스-> 미나스제라이스). 3) Universidade Federal de Rio Grande do Sul (히우그란지두술 연방대학교)의 약어로 현지에서 ‘우르기스’라고 부른다. |
이전글 | 시네마 노보(Cinema Novo) 시대의 브라질, 그리고 시네마 노보의 완성자: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
---|---|
다음글 | "알베르디, 아르헨티나 공화국 최초의 연방헌법 창안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