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6:10:27 | 조회수 : 2,774 | |||
국가 : 브라질 | |||||
장용석(문화관광부 전문위원)
중남미(中南美), 혹은 Latinamerica(혹은 Iberoamerica라고 불리우는)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가장 영토가 넓은 나라 브라질은 다양한 피부색깔만큼 지난한 근?현대사를 지닌 나라이다. 1950년대 초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1930년대 신국가 체제(Estado Novo, 1937-1945)를 부르짖었던 바르가스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사회 전역에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다양한 정치 및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브라질 영화인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1952, 1953년 각각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 파울로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브라질 영화를 만들기 위한 영화인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향후 시네마노보(Cinema Novo)를 이끌었던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 로돌프 나니(Rodolfo Nanni), 알렉스 비아니(Alex Viany) 등이 참가해 회의를 주도하였다. 바르가스 대통령은 인민주의적 개혁을 진행했지만 1954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해 그의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은 쿠비체크는, 전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통치 이념으로 '개발주의'를 주창했다. 하지만 개발주의는 사회·정치적 통제를 내포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식인과 예술인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시네마 노보의 주창자들 - 글라우베 로샤(Glauber Rocha),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 - 을 비롯한 중산 계급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쿠비체크 체제에 반대하며 브라질 문화 전반에 사회변혁의 기운이 싹이 튼다. 1955년 시네마 노보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리우 40도'(Rio 40 Graus, Dos Santos)에서부터 그 변혁은 시작된다. 영화는 독재에 맞선 무기였다. 그 전선은 글라우베 로샤, 도스 산토스가 주축이 됐던 ’시네마 노보'(Cinema Novo)였다. 브라질은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다양한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다.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이베리아 반도의 전통, 이탈리아·독일·프랑스 등 유럽 문화의 영향도 섞여 있으며, 아프리카 문화, 근세에 시작된 대규모 이민을 통해 아시아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이런 문화적 융합의 과정과는 달리 민중은 경제적인 부의 축적과 분배에서 늘 소외되었고,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즉 기존의 사회를 비판하는, 민중만의 표현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시네마 노보의 출발점이었다.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는 당시에 출현한 신영화 아티스트의 욕구 때문에 생겨났다. 1959년 쿠바혁명의 정신을 이어 1960년부터 불 붙기 시작한 시네마 노보 운동은 1964년 쿠데타 이후 쇠퇴기를 맞았다. 1968년 제 2차 쿠데타 이후에는 영화인이 군부에게 쫓겨다니고 망명해야 했다.(글라우베 로샤) 시네마 노보는 정치적·윤리적·사회적으로 자기 나라 민중을 수호하고, 브라질의 뒷골목, 농촌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화면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영화를 추구했으며, 영화를 통해 사회 비판 기능 역시 수행하고자 했고, 헐리우드 영화와는 전혀 다른 영화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른바 ‘불타는 시간‘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사실 브라질 영화의 변혁을 예고했던 글라우베 로샤의 <돌개바람>(62)이 나온 후 브리질 영화가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저항과 민족, 민중적인 입장은 다른 많은 브라질 영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쿠바혁명의 성공이, 라틴아메리카 지식인, 특히 영화인들에게 브라질의 억압된 사회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였다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최소한 그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쿠바혁명 이전에 출발한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의 빈곤과 무지에 대한 영화 <리우 40도>(55)가 위치하고 있다. 쿠바혁명이 많은 라틴아메리카 영화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대안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지만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진보적인 영화인들의 열악한 사회 상황들에 대한 자기성찰과 비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브라질 시네마 노보의 출발점은 그래서 엄밀하게 따지면 글로우베 로샤가 아니라 넬슨페레이라 도스 산토스로부터 출발한다. 아직까지 살아남아 굳건하게 초기의 시네마 노보의 이상을 실행하고 있으며 현재 브라질 영화에서 유일하게 좌파적 시각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시네마 노보의 완성자로서 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더욱 더 브라질 영화에서 돋보이는 이유는 군사독재의 근심한 탄압으로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브라질을 떠났을 때에도 산토스는 브라질에 남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산토스 감독은 1928년 상파울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인 영화인들 대부분이 부유한 가정 출신이다) 1930년대 그의 청소년기는 정치적으로는 군부와 밀착한 파시스트들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였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왔다. 전쟁이 끝나면서 브라질 공산당은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속에서 급부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법대에 들어간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법대를 졸업한 그는 파리의 영화학교에서 공부한 뒤 브라질에 돌아와 조감독을 하면서 영화산업의 노조결성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55년에 선 보인 그의 첫작품 <리우 40도>는 헐리우드 영화와의 단절을 선언한 시네노보의 선구작이었다. <리우 40도>는 그동안 유행했던 헐리우드 양식을 모방한 주류 브라질영화들 - 뮤지컬, 스크루볼 코메디 - 에 대한 반기를 든 혁명적인 시도였다. <리우 40도>는 첫장면에서 끝날때까지 그동안 브라질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외면 하였던 가난하고 굶주리는 민중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브라질의 恥部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이 영화는 가난에 찌든, 리오데 자네이루의 거리에서 땅콩을 파는 다섯 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이 영화는 다인종국가가 겪는 인종과 계급간의 갈등과 화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현실적으로 브라질만큼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도 드물다. 그러나 불과 소수의 백인에 의해 경영되어지는 국가권력은 진정한 평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산토스 감독은 얘기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공산당에 가입해 열렬히 활동을 해 왔던 그의 평소의 마르크시스트적인 사회인식에서 기인한다. 브라질 국기에 쓰여져 있는 <질서와 규범, Ordem e Progresso>이라는 글자도 이러한 상황에 대한 브라질 국민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토스 감독 그 자신도 1995년 KBS-TV 세계영화기행 촬영팀인 인디컴과의 인터뷰에서 "리우 40도란 뜨거운 열기를 나타낸다. 그 뜨거움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브라질의 현 상황이 그렇다" 라고 밝히고 있듯이 브라질의 고민은 그러한 다변적인 문화를 절묘하게 융합해 나가야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주도하던 그가 공산당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6년의 헝가리 반소봉기다.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그는 반스탈린주의가 되었고 사르트르, 프로이트를 접하면서 프랑스 실존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런 직후 그는 브라질 동북부에 사는 농민들의 비참하고 열악한 삶을 그린 <보람없는 삶(La Vida Seca, 1963>으로 국제 영화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가뭄에 찌든 황량한 불모지, 먹을것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족, 식량을 찾아서 정든 마을을 떠나 방랑하는 브라질 농촌의 실정을 고발한 이 작품은 소위 좌파 인텔리로 대표되는 시네마 노보의 영화인들에게 신선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이 영화이후로 그 동안 등한시 했던 브라질 농촌의 실상과 브라질 각처에 숨어있는 민담과 전설, 신화들과 같은 브라질 전통적인 문화양식에 관심을 촉발시켰다는데에 큰 의미가 있다. 글라우베 로샤의 <검은신, 하얀악마, 1964>, <죽은자 안토니오, 1969>, 등은 도스 산토스의 <보람없는 삶>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영화인들 서로간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네마 노보의 걸작영화들이 이 당시 출현했던 것은 시사한 바가 크다. 1964년에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어질 때 그의 대부분의 동료들은 브라질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브라질에 홀로 남아서 작품활동을 군부의 살해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행해 나갔다. 그가 브라질영화에서 차지하는 각별한 위치는 그래서인지 더욱 더 크게 느껴진다. 심한 군부의 통제와 감시속에서 만들어진 <프랑스인의 귀엽고 맛있는 목, 1974>은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작품인데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식민주의자들의 시각을 비판한다. 영화는 식민주의자들이나 군사독재자들의 사고구조에 무슨 차이가 있냐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인 태도는 <오굼의 부적, 1974>, <기적의 가게, 1977>, <후비아바, 1986>등 그의 다른 영화들에 전반적으로 일관되게 나타나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산토스 감독은 브라질 대중문화에 진정한 반영을 할 수 있는 '대중영화' 창조를 위해 노력을 경주하면서 <오굼의 부적>과 <후비아바>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다. 실존주의자로 전향한 산토스감독은 제국주의, 인종차별, 가난, 불평 등에 반대하는 운동을 계속해서 그의 영화에서 시행해 나간다. 그러면서 브라질 민중의 토속종교에 관심을 갖는데 특히 <오굼의 부적>은 그의 이런 생각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오굼의 부적>은 절대빈곤속에서 살아가는 브라질민중과 독재정권에 기생하면서 성장하는 조직폭력의 세계, 민중의 대응폭력과 경찰의 잔인한 고문등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1968년 이후 시네마 노보의 이상을 담은 영화들이 사라져 갈 때에 산토스는 줄기차게 홀로 시네마 노보의 완성자로서의 직업을 일관되게 해오고 있다. |
이전글 | 한국전 참전은 우리의 역사적 사명: 라우레아노 고메스 콜롬비아 대통령 (1889~1965) |
---|---|
다음글 | 지우마 호세피(Dilma Rousseff), 2010년 말 올해의 브라질인으로 선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