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⑨오루로 주석 가격 폭락과 차파레 마약 재배
작성자 : 임두빈 | 작성일 : 2018-06-18 19:43:15 | 조회수 : 2,337 |
국가 : 볼리비아 | 언어 : 한국어 | 자료 : 문화 |
출처 : 뉴스토마토 | ||
발행일 : 2017.06.09 | ||
원문링크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757852 | ||
원문요약 : 필자 임채원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했다. 현재는 동대학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재직하며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는 필자가 2년간 볼리비아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항해시대 이래 지속된 세계화의 그늘에 관해 <뉴스토마토> 지면에 격주 금요일마다 총 11회로 연재한다. | ||
신자유주의의 원조인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이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를 탄생시켰다고 말한다면 모순인가.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레이거노믹스로 신자유주의를 전면화했지만, 그 원조는 영국의 대처리즘이었다. 대처는 1970년대 말까지 서구 복지국가와 케인즈경제학 중심의 세상에서 보수 우파의 새로운 첨병으로 등장,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신자유주의 물결을 주도했다. 레이거노믹스는 대처리즘을 좇은 것으로 평가될 만큼 대처의 정치적 파괴력은 1980년대 세계 정치와 경제를 압도했다. 그런데 그가 주도한 신자유주의의 세계사적 물결에 반기를 드는 사회주의 흐름이 대서양 건너에서 일고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시작한 반세계화와 사회주의 운동은 볼리비아에서 에보 모랄레스 탄생으로 정절에 이르렀다. 모랄레스는 차베스 사후 남미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역설적이게도 에보 모랄레스와 그가 이끈 '사회주의운동당'이 볼리비아에서 집권하는데 일등공신은 바로 얼굴 한 번 마주친 적이 없는 영국의 마가렛 대처다. 코카잎 목걸이를 하고 대중 연설을 하고 있는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그의 정치적 기반은 코카 노동조합이었고, 지금도 이 노조의 주요 행사 때 직접 참여하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볼리비아의 사회주의 운동을 낳은 대처의 신자유주의 대처와 모랄레스의 연결고리는 조금 생뚱맞게도 주석과 코카 재배다. 1985년 대처가 영국 코넬 광산을 폐쇄하면서 세계 주석 가격이 폭락했고 그 여파는 주석을 수입원으로 하는 볼리비아 오루로(Oruro) 지역의 광산 노동자들의 삶에 직격탄을 날렸다.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광부들은 차파레(Chapare)에서 바나나와 망고 등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생산성 낮은 아열대 작물 농사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고, 코카를 재배해 생계를 유지했다. 에보 모랄레스는 바로 오루로 이주민의 아들로, 코카 농민조합의 지도자로 등장했고 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해 볼리비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처 수상이 폐쇄한 코넬 광산의 주석 생산은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영국은 1494년 지리상의 발견 이전에 유럽의 주석을 대부분 생산했고, 코넬 광산은 영국 왕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옛부터 유럽의 귀족들은 식기로 은을 사용하고 평민들은 주석으로 식기를 만들었다. 주석은 귀한 금속은 아니지만, 납처럼 사람에게 유해한 성분이 없어서다. 그런데 이 코넬 광산의 노동조합은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1980년대 초반까지 영국에서도 강성 노조로 유명했다. 대처는 수상이 된 후 노조와 강하게 대립했고, 강성 노조로 악명 높은 광산 노조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맨체스터 석탄 광산의 노조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대처의 눈에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영국 남부의 코넬 광산 노조도 눈엣가시였다. 대처는 채산성과 경영악화를 빌미로 코넬 광산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동안 이 광산이 보유하고 있던 주석 재고량을 일시에 시장에 방출했다. 그러면서 세계 주석 가격이 폭락했다. 볼리비아에서는 갱도를 통해 주석 광산에 들어가 광물을 채취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강바닥으로 흘러내린 주석을 채취하는 방법도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볼리비아 출신 세계 10대 부호가 탄생하다 사실 주석은 비철금속 중 구리, 아연 등과 달리 매장량이나 산업적인 용도가 크지 않았고, 시장 규모도 작았다. 그래서 코넬 광산의 재고량 방출은 세계 주석 시장의 격변을 불러 왔다. 여파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특히 볼리비아 주석 광산의 노동자들은 가격 폭락의 직격탄을 맞았고 오루로는 도시 전체가 휘청거렸다. 주석은 오루로와 특별한 인연을 갖는 광물이다. 세계 전체 주석 매장량에서 캐나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페루 등에 견줘 볼리비아가 더 많다고 할 수 없지만, 볼리비아는 주석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작한 곳이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사람은 한때 세계 10대 부호에 이름을 올린 시몬 이투리 파티뇨(Simón Iturri Patiño)다. 주석 시장은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이 쇠락하면서 열린 새로운 시장이었다. 원래 광산은 한 가지 광물이 아니라 몇개 광물이 광맥을 따라 같이 생산한다. 은은 구리나 아연, 납, 주석 등과 함께 묻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은광은 일정한 시점을 지나자 자원이 고갈되면서 더 이상 은을 생산할 수 없게 됐다. 1930년대에 파티뇨도 다른 광산업자들처럼 새로운 은광을 찾아 헤맸으나 소득이 없었고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그는 주석이라는 새로운 광물에 눈을 떴다. 오루로 광산에서 대량의 주석 광맥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주석 수요가 폭발했다. 그는 주석 채취기술을 개발하고 주석 학교를 세워 광산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배출했다. 그리고 이 기술자들을 캐나다와 동남아시아의 주석 광산으로 보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의 고향 오루로는 세계적인 주석 생산기지가 됐다. 차파레 코카 재배로 전업한 오루로 광부들 해발 4000m가 넘는 오루로에서는 곳곳에서 주석 광산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의 대처 수상이 코넬 광산을 폐쇄하면서 세계 주석 가격이 폭락하자 오루로의 광부들은 생계가 어려워졌고, 볼리비아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이들을 해발 1000m의 차파레 지역에 집단 이주시켜 과일 농사를 짓게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정부 보조금을 받아 바나나와 망고 등 아열대 과일을 키웠다. 그러나 전직 광부들은 과일 재배만으로는 채산성을 맞출 수 없었다. 아열대 과일들을 수확해 안데스 산맥을 넘어 미국 등에 팔아야 하는데, 해안을 끼고 있는 에콰도르 등과 비교하면 경쟁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둘씩 코카 재배를 시작했다. 원래 이들은 광산 노동자로 있을 때부터 코카 소비자였다. 융가스 지역의 아프리카 선조를 둔 흑인들이 생산한 코카를 씹으면서 갱도에서 일하던 광부들이었다. 이들은 어느 순간에 코카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처지가 뒤바뀌었다. 볼리비아의 주석 광산은 한국과 볼리비아가 합작, 공유가치 성장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곳도 있다. 이 광산에는 우리나라의 태극기가 상징적으로 게양되어 있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그런데 차파레 지역의 코카는 융가스 흑인들이 생산한 코카와는 용도가 달랐다. 융가스 코카잎은 볼리비아 노동자들이 잎담배처럼 씹어서 소비했지만 차바레 코카잎은 코카인의 원료로 사용됐다. 차파레 코카잎으로 생산된 코카인은 비밀리에 브라질과 콜롬비아 등으로 옮겨졌고, 종착지 미국에 닿았다. 원래 볼리비아에서도 광산 노조는 강성으로 유명했고 그 전통을 가진 광부 출신 농민들은 '코카 노조'를 결성, 조직의 힘으로 그들의 이익을 지켜나갔다. 코카는 볼리비아의 전통 작물로, 사회적 문화와 환경상 이를 금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볼리비아의 코카 재배를 강력하게 규제하려고 했다. 특히 1980년대 마약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아예 볼리비아에 미국 마약단속반을 상주시킬 정도였다. 볼리비아 정부도 가구당 코카 재배 면적을 제한했다. 이에 대해 코카 노조는 재배 면적 확대를 비롯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할 조직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노조의 중심에는 훗날 대통령이 된 모랄레스가 있었다. 에보 모랄레스, 코카 노조 지도자에서 대통령까지 모랄레스는 라틴 아메리카 정치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사람이다. 우선 그는 축구광이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볼리비아가 탈락했지만, 그는 남아공까지 가서 월드컵을 관전했다. 또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오죽하면 권력을 이용, 볼리비아 축구팀에 현역 선수로 등록했을 정도다. 그는 인디오 지역 곳곳을 방문할 때마다 공식 행사가 끝나면 그 지역 축구선수들과 함께 경기를 하고 직접 선수로 참가한다. 그리고 그는 미혼임에도 아들이 있다. 그는 공식적으로 결혼한 적이 없지만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차파레 코카 노조의 지도자로 활약할 당시 아들을 가졌다. 무엇보다 그는 인디오 출신 대통령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등을 필두로 반서구·반미 정치세력들이 부상했지만, 이들은 스페인계 후손들이었다. 하지만 모랄레스는 아이마라족 출신의 인디오다. 모랄레스는 코카 노조를 이끌면서 볼리비아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도로 점거'라는 새로운 운동 방법을 개발했다. 차파레는 볼리비아의 대도시인 산타 크루즈와 코차밤바 사이에 있는 농촌이다. 그러다 보니 코카 노조가 집단 농성을 하거나 대규모 집회를 열어도 시골의 외진 곳의 시위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모랄레스는 노조 집회를 차파레 지역의 고속도로에서 열었다. 볼리비아의 고속도로망은 수도 라파즈와 코차밤바, 산타 크루즈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을 가로막아버리니 전국의 교통이 마비된 것이다. 이때부터 모랄레스는 정부에서 골칫거리가 됐다. 그는 이 명성을 바탕으로 1995년에 사회주의운동당의 결성을 주도하고 하원에 진출했다. 코카인을 판 검은돈까지 정치자금으로 활용하는 악명 높은 코카 노조 지도자가 제도 정치권으로 진입한 것이다. 1995년을 시작으로 모랄레스는 10년간의 정치투쟁 끝에 2006년 마침내 남미 최초의 인디오 출신 대통령이 된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이 코넬 광산을 폐쇄하면서 시작된 주석 가격 폭락의 결과가 바다 건너에서 모랄레스의 집권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서구 신자유주의와 남미 사회주의 운동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대척점을 형성했지만, 이들이 묘하게 인과관계로 연결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루로 광산 노동자들이 주석 원석을 운반하고 있다. 광산의 생산기반이 해외 자본의 무분별한 수탈과 그 이후 국유화에 따른 방만한 경영으로 무너지진 후 볼리비아 광산들은 조합주의 형태의 열악한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공유가치 성장을 원하는 볼리비아 노동자들 1930년대 파티뇨를 시작으로 한 볼리비아 주석 광산과 코카 재배의 역사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삶을 원했을까. 그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고단한 광산 노동자에 이어 선택한 코카 재배라는 삶에 만족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1960년대에 한 차례 사회주의 정권을 경험한 바 있다. 당시 볼리비아의 대형 광산들을 미국과 영국 등 다국적 기업이 갖고 있거나 볼리비아의 일부 백인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이를 국유화했다. 그 결과 처음 얼마간은 노동자들이 행복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국유화된 광산은 노동자들에게 후한 급여를 지급하고 유급 휴가 등 만족할만한 노동조건을 제공했지만, 방만한 경영으로 이내 파산했다. 그래서 광산 노동자들이 선택한 것이 '조합주의'였다. 광산 운영에 자본가도 인정할 수 없고 국영기업 간부들에게 경영을 맡길 수 없게 된 그들은 스스로 조합 결성, 이를 통해 광산을 경영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사실은 각자가 광산에 들어가서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광석을 캐서 중간상인에게 판매하는 전근대적인 방식으로의 회귀였다. 광산 개발에 필요한 대규모 자본투자는 언감생심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볼리비아 광산업은 낙후됐다. 볼리비아 광부들이 원하는 것은 해외 자본과 볼리비아 광산노동자들이 공유가치(Shared value)를 창출하는 새로운 방식을 글로벌한 수준으로까지 도입하는 것이다. 해외 자본이 이윤추구의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볼리비아인들의 삶의 질까지 함께 생각하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할 것을 볼리비아 노동자들은 원하고 있다. 그들은 오랜 광산 개발의 역사와 노동자의 경험을 통해 그렇게 되어야만 그들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는 사실을 체득한 것이다. 앞으로 한국이 자원투자나 해외 자원개발을 할 때도 자기 자본의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공유가치 성장을 통해 새로운 글로벌 공존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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