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①1492년과 스페인,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역설 (최명호HK연구교수)
작성자 : 임두빈 작성일 : 2020-05-08 16:14:37 조회수 :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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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요약 : 연재를 시작하며
대학지성 이번 호(2020.01.05)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IIAS) HK+사업단의 <라틴아메리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월 1회 연재한다.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은 2008년부터 2018년 8월 31일까지 10년간 라틴아메리카의 세계화를 분석하는 인문한국(HK)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후 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에 다시 선정되어 2018년 9월1일을 시작으로 향후 7년간 연구 아젠다 “신전
라틴아메리카의 해 1492년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은 이젠 상식이다. 이후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정복이 있었고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1492년에 국토수복운동으로 번역되곤 하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가 완료되었으며 라틴어에서 파생된 다양한 사투리와 바스크족의 언어 등을 사용하던 이베리아반도에 처음으로 스페인어 문법책이 발간되었고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살고 있던 수십만 명의 유태인과 무슬림의 추방이 있었다. 1469년 바야돌리드에서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하면서 현재 스페인의 기반이 다져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둘은 6촌 관계로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출신으로 현재 우리나라 실정법(민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근친혼 관계였으나 교황의 특별한 허가가 있었다고 한다.(*교황의 허가가 있었다는 것이 이 둘의 결혼 자체가 문제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는 서로 증손의 관계로 우리나라 촌수로 하면 이사벨과 페르난도와 같은 6촌이 된다. 스페인어권에서는 촌수가 우리나라만큼 발달해있지 않아 보통 번역본에서는 사촌관계로 표현되는데 이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국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영토를 확보하고 도시국가 연맹의 형태에서 통일국가로 제도적 전환을 이루었으며 여기에 유태인과 무슬림의 추방을 통해 민족의 개념을 확고히 했으며 민족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언어의 통합도 바로 운명의 해, 1492년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역설이 시작한다. 이질적인 문화가 섞여 하나의 국가로 첫걸음을 내디딘 스페인에게 신대륙이라는 식민지가 등장하여 세계의 대제국이 된 것이다. 다윗의 영혼에 골리앗의 몸을 가진 것처럼 미성숙한 거인의 운명은 그 출발점에서 결정 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입장에서 볼 때도 역설이 존재하는데, 현재 카리브해 도서국가(島嶼國家)를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메스티소(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의 비율은 60%에서 80%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두 세계가 만나기 전에 ‘라틴아메리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대륙이 존재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메스티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유럽인이 아버지 원주민이 어머니가 되곤 하는데 2019년 기준으로 보면 527년, 30년 1세대 기준으로 하면 17에서 18세대가 지나가 버렸으므로 혼혈인종이라기 보다는 라틴아메리카의 다수 인종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버지를 긍정하고 어머니를 부정하거나 어머니만을 긍정하고 아버지를 부정하고는 어떠한 개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스페인 및 서구 유럽적 요소와 원주민적인 요소 모두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역사를 일제강점기와 흡사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식민지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이 구분된다 생각하기 쉽지만,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은 우리의 선입견보다 더 복잡하다. 식민지배의 폐해, 인종차별, 학살, 말살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존재의 전제가 되는 상호의존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적 역설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스페인에게 신대륙이란 거대한 식민지였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양의 화폐를 발행해주는 거대한 중앙은행이었을 수도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300여 년간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을 통해 전 세계, 더 정확히는 중국 등으로 유입된 은의 양은 8만 톤 이상이라고 한다(카를로 치풀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장문석역, 미지북스, 2015, p.35). 당시 기축통화였던 은의 대규모 유입으로 인해 국제 시장에 막대한 유동성이 창출되었고 대륙 간 무역을 추동했으며 갤리언 무역이라는 세계사 최초의 전 세계적 교역도 가능했으며 전 유럽에 가격혁명을 야기하였고 연이어 산업혁명까지 가능케 하였다. 문화사적으로 언급하면 중세의 끝과 근대의 서막을 알린 것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은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로마의 멸망(476년)에서 동로마의 멸망(1453년)까지를 중세로 보는데 변화의 동인(動因)으로 보면 중세의 끝은 당연히 1492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다시 또 하나의 역설을 만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제국은 자신의 정체성을 종교, 다시 말해 가톨릭으로 정하고 국가적 통합을 이루려 했는데,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가톨릭 군주(los Reyes Catolicos)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를 헬레니즘의 부활로 간주한다면 그 헬레니즘은 아마도 고대 그리스에서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교조적으로 변하기 전까지의 사조를 의미할 것이다. 서구 유럽이 중세를 끝내고 르네상스, 크게는 근대로 나가고 있을 때, 스페인은 다시 중세로 후진 기어를 넣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전 세계에 새로운 변화를 야기하고 스스로 과거의 세계로 갇힌 것이다.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에서 19세기 초까지 이어진 이단 심문, 교수형과 화형은 이것이 그저 개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구세계와 신대륙, 역설의 시작 ... 중세적 세계관의 강화

하지만 진정한 역설은 여기서 시작한다. 라틴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 부르는 것은 당시 구세계와 관계가 없던 탓도 있으나 그것보다 구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 다시 말하면 중세적 세계관으로 설명되고 해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추, 토마토, 초콜릿, 옥수수, 감자, 고구마, 담배 등의 원산지이기도 했지만, 그 기원을 설명할 수 없는 원주민이 존재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예, 더 구체적으로는 노아의 후예가 되어야 하는데 원주민의 기원과 유래에 관해 성경에서는 확실한 답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다른 부분 혹은 중세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여러 가설이 등장하게 되면서 성경의 권위와 중세적 세계관은 강화되게 된다. 예를 들어, 솔로몬이 배를 타고 여행한 오빌(Ophir)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설, 발달한 항해술이 있었던 카르타고인들이 이주했다는 설, 사라진 유대 10지파인 단지파가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유입되었다는 설, 아틀란티스의 후예라는 설, 페니키아인의 후예라는 설, 중국인 이주설, 노아의 아들인 함의 후예라는 설, 가인의 후예라는 설 등이 있었다. 이것은 기존의 세계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이 인식의 대상이 될 지라고 결국 관찰자의 세계관 안에서 해석되며 오히려 기존의 세계관을 견고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는 이런 경향이 더 강했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 대항해시대로 접어들자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 시대에도 지혜의 상징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기상학(Meteores)에서 적도는 불처럼 뜨거운 곳이라 사람이나 동물이 살 수 없다고 기술했지만, 실제 대서양을 건너며 지나간 적도는 오히려 추웠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고 한다. 상상이나 믿음을 통해 구성된 고대 그리스의 우주론과 세계관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새로운 세계의 발견으로 무너지기보다는 오히려 견고해졌는데, 그것은 인간의 속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인간, 문명, 문화, 민족도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나 반대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기 어렵다. 유태인의 전통 또한 탈무드 이성주의와 카발라 신비주의가 있는 것처럼 중세적 세계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에게 신대륙과 신대륙의 원주민의 존재는 중세적 판타지의 실현으로 기능하면서 오히려 중세적 세계관을 강화하게 된다,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독수리가 사는 곳, 거대한 뱀(아나콘다) 혹은 용이 사는 곳,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즐비한 곳, 엄청난 밀림 맹수들이 가득한 곳, 더 나아가 황금으로 가득한 엘도라도, 당시 상상할 수 있는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곳으로 인식되면서 중세적 판타지는 라틴아메리카와 함께 현실이 되었던 것이며 중세적 경전의 권위는 더 강화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라틴아메리카라는 타자로 인해 스페인을 포함한 당시 서구 유럽의 미개함과 야만성이 드러나게 되었고 동시에 ‘계몽’이 필요함을 스스로 깨닫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서유럽에 공통된 것이었으나 계몽주의의 발현과 함께 과학적 사고로 다른 국가들이 돌아서고 있을 때 스페인만은 예외였던 것이다. 인문주의와 르네상스를 넘어서 바로크로 향하던 17세기 스페인은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이 제국의 풍요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역사적 역설은 강화되고 동시에 희화되기에 이른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 스페인의 의인화

세계는 근대로 향해가고 있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중세의 이야기에 빠져 정신이 나가버린 기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바로 돈키호테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중세 기사 소설에 빠져 현실을 중세 기사소설로 인식하는 인물이다. 현실과 그의 인식 간의 차이가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돈키호테 1부가 펠리페 3세가 국왕이었던 1605년에 발표되었는데, 보통 이때부터 스페인의 영광이 저물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페인 너머의 세상과 그 변화를 보고 왔던 세르반테스에게 돈키호테는 어쩌면 당시 스페인의 의인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마르고 병약하며 얼굴은 길고 주걱턱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적 특징은 우리에게 기묘한 충격을 준다. 세르반테스와 세르반테스의 분신, 돈키호테 그리고 카를 5세와 펠리페 3세의 모습, 카를 5세가 창과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과 돈키호테의 모습, 유사하면서도 대조적인 이 모습이야말로 1492년과 스페인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역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대제국을 건설한 카를5세(Karl V. 1500~1558)의 초상
▲ 대제국을 건설한 카를5세(Karl V. 1500~1558)의 초상
▲ 1548년 작 뮐베르크 전투에서의 카를 5세
▲ 1548년 작 뮐베르크 전투에서의 카를 5세
▲ 펠리페 3세(Felipe Ⅲ. 1578~1621)의 초상, 카를 5세의 손자이다.
▲ 펠리페 3세(Felipe Ⅲ. 1578~1621)의 초상, 카를 5세의 손자이다.
▲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M. de Cervantes. 1547~1616)의 초상
▲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M. de Cervantes. 1547~1616)의 초상
▲ 기사소설을 읽고 있는 돈키호테, 기사, 요정, 악마가 가득한 세상은 돈키호테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폴 귀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e)의 삽화
▲ 기사소설을 읽고 있는 돈키호테, 기사, 요정, 악마가 가득한 세상은 돈키호테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폴 귀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e)의 삽화


최명호 부산외국어대학교·중남미지역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를 졸업했고 멕시코 시몬볼리바르대학 인문학대학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의 HK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살사》, 《플라멩코》, 《테킬라 이야기》, 《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 《멕시코를 맛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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