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5:55:02 조회수 : 2,029
국가 : 멕시코


 

최명호(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아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가 원래 이름이나 산타 아나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산타 아나는 멕시코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자 가장 환상문학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영웅이면서 배신자였고 귀족이며 종신대통령이며 동시에 전하(殿下, Su Alteza Serenísima)라고 불린, 왕이 아니나 왕처럼 인식되었던 인물이며 후에 거지 혹은 거지들의 대통령이 되었던 인물이며 무엇보다 멕시코의 영토를 반 이상 미국에게 빼앗긴 지도자이며 또한 동시에 미국과의 대결을 통하여 멕시코의 국가적 정체성이 생기는 데에 일조했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유머러스하며 자기중심적이며 노예근성이 가득하고 게으르고 무능력한 멕시코인과 라티노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산타 아나이다.

  멕시코가 처음 독립하고 이투르비데 제국시기에 멕시코의 영토는 약 4,500,000 ㎦정도였으나 1853년 산타 아나의 정부는 멕시코 북부 지역을 대거 미국에게 빼앗겨 결국 영토가 1,972,546㎦가 된다. 50% 이상의 영토를 잃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잃어버린 지역에 텍사스와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등의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에 이 지역들은 기본적으로 사막지역이며 무역의 중심지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지켜야할 이유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 석유사업의 중심이 텍사스라는 것과 이 지역에 매장된 석유의 양을 생각해보면 산타 아나는 그저 영토를 잃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부의 핵심적인 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림1.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아나의 초상

  

  산타 안나는 1794년 2월 21일에 멕시코, 베라크루스 주, 할라파에서 태어났다. 중산층이상 집안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베라크루스주의 방위군, 식민시대 스페인을 위해 충성을 바친 왕립군대의 장교로 활동을 시작한다. 멕시코의 초대 황제인 이투르비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왕실의 입장에서 독립 세력을 탄압했던 것으로 보인다. 멕시코의 독립세력이 이달고 신부에서 모렐로스 신부 그리고 게레로 장군으로 이어지면서 세력이 점점 강해지게 되자 이투르비데를 비롯하여 산타 아나는 독립세력 쪽으로 기울게 되고 이투르비데와 게레로가 제휴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멕시코는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산타 아나는 공을 세워 장군이 되고 이후 주목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스페인과의 무역항으로 유명한 베라크루스 항구의 스페인 군대를 제압함으로 해서 독립의 기초를 닦게 된다. 그 시작에서부터 자신이 원래 속했던 스페인 군대에 대한 배신을 통해 멕시코 독립의 영웅이 되는 이 역설이 산타 아나의 삶에 뿌리 내리게 된다. 산타 아나는 당시 다른 군부의 꿈나무 혹은 야망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상형으로 나폴레옹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실제로 여러 가지 별명으로 불렸지만 서쪽의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평민으로 태어나 황제의 위치에 올라간 나폴레옹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혁명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부르봉과 합스부르크 출신이 영주가 되고 왕이 되고 황제가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당시 유럽의 현실적 정치와 인식까지 한 번에 파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타 아나는 나폴레옹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영웅과 배신자 혹은 악마적 이미지가 대조적으로 한 인물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과 배신자의 이미지가 희극적으로 나타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3년부터 1853년 까지 20여 년 동안 11번이나 대통령직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심지어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쿠데타를 자작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정부에 자신이 반기를 들어버린 것으로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이나 당시 멕시코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다. 당시 멕시코는 독립 초기로 다른 라틴아메리카와 비슷하게 중앙집권주의자와 연방주의자의 대립도 있었고 또한 군주제 지지자들과 미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도 존재했다. 또한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군부 또한 막후 세력으로 존재했다. 이런 세력들이 혼란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는 과정에 독립초기인데 산타 아나는 특별한 이념적 지향점이 없었다. 그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각 세력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는 과정 동안 국토의 반 이상을 잃어버렸으며 미국에게 국토를 침탈당하고 심지어 수도까지 침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후에 '전하'라고 불렸으며 아주 사치한 삶을 살았고 또한 당연하게 권력을 잃고 오랜 시간 동안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70세가 넘어서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그는 살던 지역의 거지들에게 '전하'라고 불렸다 한다.

  1838년 산타 아나는 프랑스와의 전쟁 소위 파이전쟁 1) 이 명칭은 멕시코 시티에서 일어난 소요상황으로 빵가게를 약탈당한 한 프랑스인의 청원을 들어주기 위해 프랑스 군함이 베라크루스 항을 포격한 데에서 유래했다. 한 개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는 것은 자유무역협정의 '투자자 재소권'을 연상케 한다. 이라 불리는 전쟁에서 왼쪽 다리를 잃었다. 20여 년 동안 11번 동안 대통령 자리에 오를 때마다 산타 아나의 절단된 다리는 대주교의 축복 속에서 장엄하게 안치되었고 실각할 때마다 성난 폭도들에 의해 내던져지고 훼손되었다. 그의 절단된 다리는 모두가 아는 거짓말이었고 벌거벗은 임금님의 멕시코 버전이었다. 모두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 또한 그 절단된 다리에 보내는 축복과 기도 또한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림2. 산타 아나가 사용하던 의족


그림3. 몬테레이에서 미국군에게 항복하는 산타 아나

  

  산타 아나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역사적으로 내부적 혼란을 외부의 적의 존재로 인해 해소하는 효과가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로 변하는 과정의 미국의 침략으로 인해 멕시코라는 국가의 정체적이 희미하고 부정적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강화되었다는 것을 그래도 긍정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자국민에게는 '전하'라고 불리면서 왕이나 황제의 모습으로 나타난 독재자가 미국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의 혼혈인의 모습이라는 이 극단적 이원성이 한 개인에게서 구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멕시코의 어두운 특성 중 하나이다. 특히 미국에게 갖는 막연한 두려움의 근원도 바로 산타 아나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리오 그란데 강을 중심으로 생긴 미국과의 국경은 현재도 멕시코의 가슴에 깊은 흉터가 되었고 동시에 현재도 상처가 되고 있다.

  산타 아나는 우리나라의 한국병처럼 멕시코 병의 유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보다는 독립초기의 혼란함과 민족적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로 보는 것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더 의미 있을 것이다. 내적 역량이 성숙되지 못한 상황에서 혹은 유럽의 역사가 걸어온 그 질곡의 역사, 그 피와 땀을 겪지 않고 그 결실만을 원한 것은 아닌지 비판하고 반성케 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타 아나는 대통령이었지만 유럽의 왕을 키치적으로 패러디했다. 러시아 황제도 입기 어려웠던 흰색 담비 망토를 입기 시작했고 궁전 근위병의 제복을 프랑스에서 수입하는 등 사치의 극단에 있었고 국고를 탕진했다. 극단적인 면이 있다고 해도 산타 아나는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독재자들, 전투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독재자들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자국민들에게는 군림했고 외세에는 무기력했다. 하지만 이것은 거대한 역사의 시발점이었다. 산타 아나는 극복해야할 대상이 되었고 이후 베니토 후아레스와 포르피오 디아스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멕시코 혁명까지 그의 영향력은 부정적으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의 파쿤도가 남아메리카의 까우디요의 전형이라면 멕시코 까우디요의 전형이 바로 산타 아나가 될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가 비판적으로 돌아봐야 하는 인물이며 그와 동시에 국가란 무엇이며 국민이란 무엇언지 등 근원적인 질문들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역사/정치적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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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명칭은 멕시코 시티에서 일어난 소요상황으로 빵가게를 약탈당한 한 프랑스인의 청원을 들어주기 위해 프랑스 군함이 베라크루스 항을 포격한 데에서 유래했다. 한 개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는 것은 자유무역협정의 '투자자 재소권'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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