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토미Simon Tormey
1963년 아일랜드공화국 더블린에서 났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대체로 그랬듯,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더블린을 떠나 영국 런던 북부 지역에서 자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리세스터Leicester대학 특별연구원이 된 것이 1988년. 1990년 노팅엄Nottingham대학으로 옮긴 뒤 이곳에 계속 머물면서 2005년부터 전임강좌를 맡고 있다.
처 음 공부에 발들였을 무렵에는, 특히 전쟁과 인종학살이 정치이론가들의 연구에 끼친 효과와 관련하여, 2차대전 이후 비판이론과 급진사상이 보인 궤적에 관심을 쏟았다. 게오르크 루카치의 제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아그네스 헬러Agnes Heller에게 흥미를 느낀 것도 그래서였다. 2001년 맨체스터대학 출판부에서 낸
발간사|지식발전소를 세우는 뜻
감사의 글
서문
1.‘자본주의’는 ‘왜’ 등장했고 ‘어떻게’ 굴러가는가
정의의 문제
자본주의, 독특한 경쟁의 체제
자본주의는 지금
자본주의를 사랑하는 법
신자유주의와 정치의 종말
2.왜 시애틀인가? - 1968년, 역사의 종말과 현대 반자본주의의 탄생
자유민주주의의 문제들
1968년, 그리고 대항 정치의 ‘위기’
프라하의 봄, 그리고 소비에트 맑스주의의 ‘종말’
파리, 1968년-비공식 정치와 새로운 급진주의
에둘러 조롱하기, 볼거리, 오늘날의 반자본주의
1968년, ‘신사회운동’과 직접 행동
베를린에서 시애틀까지-세계 반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
결론
3.운동들의 운동 I - 개혁주의, 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반자본주의적인 견해와 사상 분석하기-준비운동
‘강한’ 그리고 ‘약한’ (자유주의적) 개혁주의
‘강한’ 개혁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귀환
‘세계는 하나다’-전지구적 사민주의를 향하여
전지구적 사민주의는 가능한가?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것인가?
4.운동들의 운동 II - 이단자, 급진주의자, 혁명주의자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의 맑스주의
‘볼셰비즘’을 넘어-자율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비??정통’ 급진주의
아나키즘, 또는 ‘위임’하지 않는 기예
짙은, 더 짙은, 가장 짙은 녹색
야 바스타!-마르코스와 ‘사파티즘’에 관한 짧은 여담
결론
5.반자본주의의 미래(들) - 문제와 전망
여기에서 저기로-운동의 동력과 집합적 행동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저항의 논리
‘다수’를 추구하며
소수자의 논리-더 나은 세상을 향해
결론
한국어판 후기|민주주의의 전복을 꿈꾸며
보론|자본주의를 넘어서-한국에서의 도전(이재영)
주요 사상가와 운동, 용어 정리
오늘날의 반자본주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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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발간의의
한미FTA 타결은 향후 국회 비준 여부와 관계 없이 한국 사회의 재편 방향을 둘러싼 일대 ‘전환점’이 될 것이다. 당장 눈앞에 놓인 상황을 놓고 보자면, 1980년대 ‘민주화 세력’의 적통을 자임하며 민주주의의 완성을 이루겠노라던 참여정부 또는 ‘1987년 체제’가 정작 ‘신자유주의 지배동맹’에 기초한 시장독재의 완성으로 수렴하고 있어서다.
무 엇보다 1987년 체제 자체가 소위 ‘진보개혁’ 진영이 일궈낸 결실로서 평가받아왔던 만큼, 진보개혁 진영의 향후 진로와 그 내용을 둘러싼 재고再考는 우회하기 힘들어 보인다. 최장집•조희연•손호철 교수가 최근 ‘진보(위기)논쟁’을 통해 시장의 전횡을 제어해야 한다는 데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제도정치(또는 정당정치)의 질적 성숙(최장집), 민주주의의 퇴행을 저지할 사회운동 역량의 제고(조희연), 반신자유주의 연대전선의 강화(손호철)를 주장했던 것도 다 이런 정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진보논쟁’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바, 민주주의의 완성이 사실상 시장독재의 완성으로 수렴해온 작금의 흐름을 일종의 ‘후퇴’로 규정하고 있다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물론, 이런 규정이 진보진영의 활로 찾기에 과연 얼마나 보탬이 되겠느냐 하는 점이다. 동서고금을 떠나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대의)민주주의라는 형식을 통해 ‘통합과 배제의 정치’를 합리적으로 운용해왔음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렇다. 요컨대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는 자본주의의 여러 해악과 ‘불화’하기는커녕 심지어 더불어 ‘발전’할 수도 있음을, 참여정부의 행보는 본의 아니게 웅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의 ‘완성’을 넘어 ‘어떤’ 민주주의인지를 묻는 것조차 이제는 상당히 밋밋한 문제제기일지 모른다. 자본주의는 이미 여러 가지 얼굴의 민주주의를 선택지로 삼아 존속을 꾀해왔고 또 그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실질적 민주주의’의 추구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더라도, 좀더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긴 호흡과 좀더 폭넓고도 장기적인 시야로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재편 방향을 가늠해야 할 ‘진보(개혁)’ 진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 우리 진보운동은 ‘상식’ 같은 애매한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어떻게 씨름할 것인가’를 다시 중심 화두로 삼아야 할 때”라는 정치경제평론가 홍기빈 씨의 지적이 의미심장하면서도 새삼스러운 까닭...(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