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까딴(Yucatan) 반도는 멕시코의 동부에 위치한다. 북서쪽으로는 미국 플로리다 반도와 멕시코 만을 사이에 두고 있고, 동쪽으로는 카리브 해와 만난다. 남쪽으로는 과테말라 및 벨리즈와 접경하고 있고, 현재는 유까딴 주, 낀따나로(Quintana Roo) 주, 깜뻬체(Campeche) 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고대 마야문명이 번성했던 곳으로, 반도의 북부인 현재의 유까딴 주는 후기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기에 1519년 스페인의 침략자들이 올 당시에도 수많은 마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침략 당시 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아스떼까(Azteca)와는 달리 마야 문명은 쇠퇴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치아빠스에서 과테말라 북부로 이어지는 셀바의 빽빽한 열대우림 속 마야 사람들의 저항은 거의 2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유까딴 주에서도 1761년 마지막 아하우(Ahau)로 추앙된 하씬또 까넥(Jacinto Canek)이 무너질 때까지 크고 작은 저항이 계속되었다.
유까딴의 까스따 전쟁은 1847년에 발발하여 1901년까지, 약 54년간 계속되었다. 이는 약 7년간의 폭력적인 전쟁 기간(1847-1854)과 마야 사람들이 반도 북동쪽의 밀림으로 물러나서 47년 동안 살았던 기간(1854-1901)을 일컫는다. 까스따(Casta)는 계급을 의미하는데, 전쟁의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피지배와 지배, 원주민과 백인의 사회 계급적이고 인종 대립적인 전쟁이었다. 당시 유까딴에는 라디노(ladino)라고 부르는 스페인의 후예 끄리오요(Criollo)와 스페인과 마야원주민의 혼혈인 메스띠소(Mestizo), 그리고 마야(Maya) 원주민이 있었다. 이 모든 사회계급의 구성원이 뒤엉켜 싸운 이 전쟁은 ‘마야의 사회전쟁(Guerra Social Maya)’이라고도 부른다. 까스따 전쟁은 무엇보다 멕시코 역사상 가장 처절한 유혈 전쟁이었다는 것과 54년간 지속된 오랜 반란 기간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약 7년(1847-1854)간의 폭력적인 시기를 지나 1854년부터 1901년까지 4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 사람들이 들어온 이후 유일하게 ‘원주민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도시가 세워졌었다.
이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유까딴 주의 바야돌리드(Valladolid), 띠시민(Tizimin), 떼삐츠(Tepich), 띠호수꼬(Tihosuco) 및 낀따나로 주의 찬 산따 꾸르스(Chan Santa Cruz, 현재의 까릴요 뿌에르또)에 이르는 지역에는 아직도 싸움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다. 띠호수꼬와 떼삐츠의 주민들은 반란을 이끌었던 원주민 지도자들의 동상을 세우고, 전쟁의 박물관을 만들고, 사건의 과정을 재현하는 드라마를 공연하는 등 해마다 7년의 전쟁을 기억하는 행사를 연다. 까릴요 뿌에르또에는 찬 산따 꾸르스를 모시는 예배당이 그대로 있는데. 주변 마을에서 온 대표자들이 돌아가며 십자가를 지키고 있다. 마을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전쟁을 이끈 지도자들이 불의와 가난의 비참한 상황에 빠진 마야 사람들을 위해 싸웠다고 말한다.
까스따 전쟁이 원주민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까스따 전쟁의 경과를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전쟁의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