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력이란 무엇인가 ― 국가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은 폭력에 대한 정치학적 성찰
2008년의 촛불 집회는 한국 사회에 여러 의제와 함께 ‘폭력’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제기했다. 한편에서는 시위의 성격이 변질되었다며 ‘촛불 폭력’을 이야기하고 한편에서는 경찰의 ‘폭력 진압’을 비판하는 가운데 빚어진 혼란과 대립은 폭력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성찰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과제를 일깨웠다. 폭력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폭력인지, 폭력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것은 또 누가 결정하는지, 폭력과 비폭력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법과 폭력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민주주의는 폭력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미래의 폭력은 어떤 모습일지, 폭력은 사라질 수 있을지…….
그러나 촛불에 대한 무수한 논의 속에서 이 주제는 잊혀갔고, 2009년 초 한국 사회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폭력의 문제를 또다시 목격하고 있다. 야당 대표에 대한 고발을 거쳐 ‘국회폭력행위방지’ 특별법 논란으로 이어진 소위 ‘의회 폭력’ 사태, 그리고 시민과 경찰의 인명을 앗아간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은 폭력과 비폭력을 기계적으로 나눌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서부터 구조적 폭력과 이에 맞선 대항 폭력의 정당성, 국가가 독점한 폭력인 공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 등 다시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매우 현재적이다.
한국 사회와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기본적인 열쇠가 되는 개념들을 뽑아 그 의미와 역사, 실천적 함의를 해설하는 ‘비타 악티바Vita Activa|개념사’ 시리즈의 여섯 번째 권『폭력』은 소장 학자가 이 예민하고 뜨거운 개념을 본격적으로 파고든 저작이다. 저자는 폭력의 어원을 추적하고 동서양 사상가들의 이론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방식 대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정치적 틀인 근대적 의미의 주권 국가와 관련해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즉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중심으로 폭력의 기원과 구성, 정당성의 문제, 사용 양태의 변화 등을 탐색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폭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여기는 도덕주의적 주장이나, 국가를 유일한 폭력 독점의 주체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불법적인 폭력 사용’과 ‘합법적인 폭력 사용’이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 국가주의적 주장을 모두 지양하고, 폭력 자체를 사회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국가와 폭력’, ‘폭력과 판단의 문제’, ‘민주주의와 상징적 폭력’을 거쳐 ‘폭력의 변화와 폭력의 미래’를 탐색하는 이 책은 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본격적인 논쟁과 이론적?실천적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
2.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폭력 ― 폭력성을 결정하는 것은 폭력의 대상이다
이 책은 우선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폭력을 일차적으로 “파괴를 수반할 수 있는 강렬한 힘”으로 정의한 저자는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논점을 더해 폭력의 속성을 세밀하게 규정한다. 즉 폭력은 파괴를 수반할 수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만, 경험과 적응 여부에 따라서 그 강렬함의 정도와 두려움의 정도는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폭력의 폭력성을 결정하는 것은 폭력의 사용자가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다. 그리고 폭력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 즉 인간이 그것을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처럼 연상할 수 있어야 비로소 폭력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폭력의 상대성과 주관성을 이해하면, 가령 성폭력 피해자에게 동일한 행동에 대해 왜 유독 너만 민감하게 반응하느냐는 비난이 잘못된 것임이 명확해진다. 그런데 폭력에 관한 질문에는 언제나 어떠한 힘의 사용이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묻는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폭력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부당한 힘의 사용이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폭력인지를 묻는 것은 힘의 정당성 여부를 묻는 것이 되고, 이는 다시 판단의 문제, 즉 어떤 힘의 사용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과연 누가 판단할 것인가로 이어진다.
3. 국가는 어떻게 폭력을 독점하는가
판단의 공통 기준 및 그 기준을 강제할 공통의 힘이 없는 상태를 17세기의 정치철학자들은 ‘자연 상태’라고 불렀는데, 공통의 권력이 없는 탓에 전쟁 상태인 이 자연 상태의 귀결은 모두 다 죽는 것이다. 각 사람의 생존율 0퍼센트라는 자연 상태의 엄청난 폭력성 앞에서 모두가 자연적 권리를 포기 또는 양도함으로써 평화를 이루는, 일종의 이론적 구성물로서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국가는 독점된 폭력의 추상적 형식이다. 국가는 사람들이 자연 상태에서 보유하고 있던 모든 폭력을 자신 안으로 흡수함으로써 그 자신이 폭력이 되고, 압도적인 함으로 평화를 유지한다.
국가는 폭력의 사용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정당한 폭력’의 사용을 독점한다. 국가 상태에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정당한 폭력과 부당한 폭력으로 구별되어 국가가 인정하는 폭력은 ‘권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폭력은 ‘폭력’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금지되고 억압될 뿐이다. 국가는 평화를 약속하면서 폭력, 또는 폭력의 정당성을 독점하고, 국민들은 그 약속을 믿고 국가에 복종한다. 그리고 국가의 폭력 운영 방식을 기록해놓은 매뉴얼이 바로 법이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폭력 독점은 언제나 도전받기 마련이다. 현실에서 국가의 자기보존 노력과 개개인의 자기 보존 노력이 상충할 때 국가의 폭력 독점의 정당성은 의심받게 되고, 반대자들은 권력의 억압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한다. 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법 구성적 힘’이 ‘생각하는 존재’인 사람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더 완전하게 만들려는 경향을 지닌 국가는 폭력을 동원해서 반대자들을 제거하고 통일성을 이루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생각의 능력, 사상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로 사람들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국민이 최종적인 판단의 권한을 가진다는 이유로(사실은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곧 최종적인 판단의 권한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또는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판단의 권리가 철학적/과학적이거나 윤리적/종교적인 것에 근거한다고 보고 국가의 판단에 불복종한다. 그러나 국가는 이런 식의 사적인 판단과 주관적 규정을 허용하지 않으며, 자신의 처벌권 행사나 강제적인 법 집행이,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신체를 파괴하더라도, 정당한 권력의 사용이라고 강변한다.
실제 역사에서 사람들은 국가의 부당한 권력을 역으로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거기에 저항해왔다. 국가에 맞서 자신의 ‘옳음’을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 또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실현하려고 시도해온 것이다. 간디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의 비폭력 저항의 성공에 힘입어 20세 후반에는 비폭력적 저항이 유일하게 정당한 저항의 수단인 것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비폭력의 수단적 가치에 회의를 품은 이들이 ‘반폭력’ 또는 ‘대항 폭력’ 개념을 제기한다. 이 개념에는 국가와 체제의 정당성을 결여한 폭력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채택되는 폭력은 국가의 부당한 폭력과 동일한 수준의 폭력이 아니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렇게 해서 폭력은 다시금 정치의 장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4. 민주주의와 폭력 ― ‘상징적 폭력’은 물리적 폭력보다 더 강력하다
민주주의는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을 강제력이 아니라 동의에 근거해 유지함으로써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체제이다. 폭력 여부는 국가의 법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법은 언제든지 법적 절차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에 의한 폭력, 즉 지배를 위한 지배 계급의 물리적 폭력은 사라진 듯하지만, 사실 그것은 ‘문화’라는 외피를 쓰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행사된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폭력’이다. 상징적 폭력은 사람들의 욕망을 구성하고 통제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를 합법적이게끔 만든다.
이 책은 지난 해 큰 인기를 얻은 텔레비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예로 들어 상징적 폭력의 성격과 작동 방식, 그리고 그 속에서 재생산되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부르디외의 말을 빌려, 사람들이 댄스 음악 소리는 시끄럽다고 느끼고 클래식 음악 연주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미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상징적 권력의 효과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징적 권력은 문화적인 것들 간의 위계를 마치 순수한 것처럼, 비정치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문화적인 것은 이미 정치적이고 사회 경제적이다. 상징적 권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 계급의 취향과 가치를 추구하게 하며, 이로써 자신들의 열등한 위치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처럼, 언뜻 투명해 보이는 민주주의의 법적 절차 뒤에 상징적인 질서가 존재하고, 그 상징적인 질서 속에서 문화적 자본이 불평등하게 분배됨으로써 법적 절차에 참여할 개개인들의 능력을 불평등하게 만들고, 그 결과 민주적 과정은 계급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5. 폭력의 변화, 폭력의 미래
폭력의 정의에서 시작해 국가와 폭력 및 폭력과 권력의 관계, 거기에 얽힌 판단의 문제와 저항,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폭력이 처리되는 방식을 차례로 살펴온 저자는 마지막으로 ‘폭력의 탈독점/사사화’라는 폭력의 변화에 주목한다. 이 변화의 기점은 ‘9·11’ 테러이다. 영토 국가라는 물리적 세계를 전제로 국가에 의해 독점되었던 폭력은 ‘9·11’을 계기로 다른 양상을 띤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오늘날 폭력은 주로 사적인 목적, 즉 경제적인 동기에 의해서, 그리고 사적인 주체, 즉 군인이 아닌 무장 단체에 의해서 이용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사적 분쟁의 주체는 대부분 비국가적 무장 단체들이다. 이들이 국가 안에서 폭력을 독점하지 못한 정부군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무장 단체들끼리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새로운 전쟁’ 또는 ‘지구적 내전’이라고 한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는, 비국가적 행위자들은 높은 희생 태세를 보이는 반면 국가적 행위자들은 그렇지 못한, 새로운 전략적 비대칭성이 등장하게 된다. 미국과 같은 국가들은 한편으로는 고도로 발달한 무기 체계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를 전문화하고 시민들을 탈군사화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폭력을 겪는 당사자의 주관적인 느낌 속에 실존하는 폭력의 속성은 오늘날 지구화한 군사적 분쟁에 전략적으로 이용된다. 가령 국제적인 테러 집단은 탈영웅적 사회가 보이는 폭력에 대한 예민함을 공격의 목표로 삼는다. 테러에 대한 과민한 반응과 공포가 역으로 테러를 ‘폭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는 탈영웅적 사회들은 한편으로는 시민들에게 ‘영웅적 초연함’을 불어넣으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 기술 상의 우월함을 견지하려고 노력한다. ‘제국’이나 ‘지구적 리바이어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사사화한 폭력과 더불어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말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책을 맺고 있다. 그 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폭력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면, 폭력에 무뎌지는 것이 좋을까 폭력에 예민해지는 것이 좋을까? 폭력에 무뎌지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고 남이 겪는 폭력을 마치 내가 겪는 폭력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도덕적 요청과,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상대의 공격이 자신에게 폭력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단련하고 폭력에 무뎌지게 해야 한다는 정치적·군사적 요청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게 된다. 폭력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며,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하고 더 큰 폭력에 익숙해져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타인이 겪는 폭력을 폭력으로서 느낄 수 없게 된다. 이 폭력의 딜레마에서 우리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