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한국은 권위적이고 기존 질서에 변화를 꾀하는 많은 활동을 죄악시하며 이기적이라 매도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식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오히려 이를 두고 아름다운 전통이라 미화하기도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무지야 말로 실로 무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개혁의 의지가 있을지라도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이는 우리의 거부할 수 없는 역사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되었는가?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는 유구한 역사를 두고 본다면 일제 치하와 독재의 시기는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영향력을 실로 어마어마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 당시의 질서에 의해 지배 받고 있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식민주의’인 것이다. 우리가 포스트식민주의의 한 가운데 놓여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Postcolonial Theory 라는 단어는 낯설게만 느껴진다. 이에 대해 학문적인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가 있긴 했던가? 아니, 오히려 우리는 이를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활용해온 듯싶다. 나와 다른 목소리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세함으로써 통일을 추구하고, 경제성장 이외의 것에 대한 욕구는 없는 것 마냥 포장해버렸던 지난 날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를 절대시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억압했던 것, 그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냈던 또 다른 식민지배였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19, 20세기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지배 받는 족속으로 살도록 길들여졌다. 저자는 (심지어)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간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마르티니크 섬 출신의 혁명가 프란츠 파농의 운동 역시도 서구적인 무언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국가를 지배하던 식민 본국으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이 경험을 통하여 식민주의적 문명화의 본질에 대해서 눈뜰 수 있었다. 파농의 언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르트르의 냄새에서부터 시작하여, 포스트식민주의를 기술함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푸코, 데리다 등의 이름 역시 서구의 현대 철학 그 중심에 서 있음을 고려한다면,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 역시 식민주의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모호함으로 인하여 다수의 국가들은 ‘독립’을 넘어선 목표선을 긋지 못한 체 맹목적으로 서구의 것을 수용하기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해방자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 미국을 절대적으로 신봉했으며, 심지어 우리의 역사를 일그러지게 만든 일본의 경제와 문화마저도 그대로 우리 안에 수용했으니 말이다.
서구적인 것이라면 좋은 것으로, 힘을 가진 자의 것이라면 정당한 것으로 치부하는 흐름 속에서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사라지게 된다. 마음 속으로는 격렬히 열을 내면서도 공식적으로는 받아들이는 모호한 상태, 그것이 과거와 같은 정치적, 군사적인 의미의 지배는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 그 식민지배 질서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견고한 형태의 지배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