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식민사를 딛고 서는 탈식민의 선언문
서구는 어떻게 라틴아메리카를 만들어 왔는가
최근 약 10년 새 라틴아메리카 각국에 연달아 들어선 좌파 정부들로 인해 형성되는 정치적 담론들을 제외한다면, 이 대륙과 관련된 지적 담론은 거의 회자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이 떠올릴 ‘해방신학’과 ‘종속이론’은 벌써 태동 후 50~60년이 지났으며 더 이상 갱신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어떠한 지적 담론도 생산해 낼 수 없게 된, 그저 정치세력들의 각축장 중 하나에 불과해진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대륙의 전통적 비판정신을 계승한 식민성/근대성 연구는 현재 라틴아메리카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지적 담론 중 하나로서 세계 사상사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엔리케 두셀(멕시코), 아니발 키하노(페루) 등과 함께 이러한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기호학자 월터 D.미뇰로(Walter D. Mignolo)는 연구 그룹의 좌장 역할을 하고 있는 학자로서 이 책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The Idea of Latin America)을 통해 이러한 ‘(탈)식민성 연구’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란 무엇인가’ 혹은 ‘라틴아메리카는 어떻게 수탈당해 왔는가’를 말하는 책이 아니다. 대신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라는 대륙이 서구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식’ 속에서 어떻게 식민화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하며, 이것이야말로 근대성의 핵심적 구성요소였음을, 나아가 이러한 인식과 질서를 타파하는 데 진정한 ‘해방’의 길이 있음을 역설한다. 이것은 일종의 ‘탈식민주의 선언’이다. 이 책의 원서가 ‘블랙웰출판사 선언 시리즈’(Blackwell Manifesto)에 속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메리카는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유럽은 역사학자를 발명했고, 이들을 잘 활용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16세기 스페인 선교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로부터 19세기 헤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맑스로부터 아널드 토인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며 세계질서를 서술했고, 아메리카는 항상 그들이 부여하는 질서 속에 위치했다”(21~22쪽). 우리는 여기서 ‘주체’로서의 유럽과 ‘대상’으로서의 아메리카(및 다른 대륙들)라는 위치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서구 유럽은 언제나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유럽인들은 대륙을 분할하고 그곳에 인식론적 위상을 부여할 자격을 갖춘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세비야의 이시도로의 ??어원학?? 9세기 판본에 등장하는 ‘O 안의 T 지도’(T-in-O map, T/O map)를 보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각각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함, 야벳과 연결시킨 것을 볼 수 있다(66쪽). 논리적으로는 도무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연결이지만, 노아가 나체로 잠든 자신을 웃음거리가 되게 한 둘째 아들 함과 그 후손(즉, 아프리카)에게 “형제의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저주를 내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연결에 은폐되어 있는 서구 기독교 인식론의 뿌리 깊은 인종적 우월성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보면 아메리카가 세계지도에 기록되고 세계 역사에 편입된 것 역시 단순한 지리적 ‘발견’의 결과가 아니었다. 서구는 자신들의 제국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와 노동력과 자원의 공급처로 아메리카를 ‘발명’했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화와 세속적 문명화라는 ‘임무’의 수행으로 포장되었으며, 이러한 식민성은 근대라는 자신들의 이상을 세계 각지에서 구현하고 완성하기 위한 핵심적 구성요소였다. 따라서 근대성은 식민성 없이 성립할 수 없으며, 이 둘은 동일한 현상의 다른 이름이다. “당신이 근대적이라면 동시에 당신은 식민적이다”(43쪽).
식민적 상처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식민성 이데올로기의 특징 중 하나는 근대성의 진행 방향과 어긋나는 것들을 말살시키고 제거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은폐한다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자유주의자라고, 사회주의자라고 말할지언정 자신을 식민주의자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문명•발전•근대화 등의 수사를 동원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거대한 ‘은폐’는 근대/식민 세계체제를 500년 동안 지탱해 온 버팀목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등장 또한 대륙 고유의 운동이 아닌 유럽 제국들의 역사의 산물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이 부상하던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던 프랑스가 문명화의 임무를 정당화하고 미국에 맞서 이 지역에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라틴성’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 개념을 정체성으로 삼았던 크리올 엘리트들의 노력조차 ‘라틴적이지 않은’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을 열등한 위치에 놓거나 지워 버리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내적 식민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게다가 1898년 스페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라틴아메리카인들은 다시 한번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원주민 자신들의 삶•역사•행동•실천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이루어졌다.
‘역사’(History) 속으로 편입되기 위해 스스로의 역사(history)를 부정해야 한다는, 자신의 존재•인식•경험을 버리고 타자의 그것을 취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자기부정이 식민지 원주민들과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에게 남긴 커다란 ‘식민적 상처’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프란츠 파농의 책 제목으로서 미뇰로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을 낳았다. 하지만 근대성이 구축해 온 강고한 ‘식민적 권력 매트릭스’의 틈새를 뚫고 분출하여 여기에 변화의 압력을 가하는 이들 또한 바로 이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균열과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공존을 향한 새로운 세계질서
볼리비아 역사상 첫 원주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2005년 겨울 그의 첫번째 당선은 ‘첫 원주민 대통령’이라는 의미보다는 브라질의 룰라 다 시우바를 필두로 한 ‘남미 좌파의 부흥’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더 튼튼한 하부구조의 건설로 대륙의 잠재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믿는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2009년 12월에 재선에 성공한) 모랄레스는 천연가스의 국유화, 토지제도의 개혁, 제헌의회 구성 등 ‘신자유주의 없이 잘살기’ 위한 탈식민적 실험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존재는 (근대성의 틀 안에 속해 있는) 좌우라는 이념의 관점보다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식민과 탈식민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의 당선은 원주민 운동이 라틴아메리카 좌파에 합류하는 ‘좌파로의 전환’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의 주도권이 오로지 맑스주의 좌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좌파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유럽 중심적 좌파가 스스로를 지역화하고 이를 통해 재기할 수 있는 기회”(278쪽)인 것이다.
모랄레스의 사례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탈식민적 선택’의 움직임이 눈에 띈다. 이미 국제사회운동의 ‘스타플레이어’로 떠오른 사파티스타와 세계사회포럼을 비롯하여 원주민회의, 에콰도르의 대안적 문화대학인 아마우타이 와시, 미국 내 라티노들의 단체행동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지배해 온 세계질서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폭력적인 인식론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항과 전복이 아닌 ‘공존’의 패러다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존 질서에 가장 근본적이고 위험한 도전이다. “테러리스트들을 죽이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공존의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지식과 사회조직의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이들의 사유를 마비시키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합법화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218쪽)이기 때문이다.
미뇰로를 포함한 이들 연구 그룹이 세계 지식계에서 커다란 명성과 발언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그 자체가 곧 편향된 ‘인식과 지식의 지정학’의 증거이며, 이것이야말로 이들의 비판이 조준하고 있는 지점이다. 이 책은 이러한 헤게모니적 삶과 인식에 통합되었던 사람들이 정당하지 않은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해 주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과 인식, 역사와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를, 책의 부제처럼 ‘식민적 상처’를 딛고 ‘탈식민적 전환’을 선택하기를 요청한다.
이 책은 정치적•문화적 담론에 한정되어 있던 국내 라틴아메리카 연구의 지평을 넓힘은 물론 “16세기에 시작된 이래로 모습을 바꾸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전 지구적 식민성의 논리에서 볼 때 (라틴아메리카와) 유사한 입장에 놓여 있는”(한국어판 서문, 7쪽) 한국 사회에 일제 식민 시기와 관련된 좁은 의미의 식민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식민성 논의를 제공한다. 아직 극복되지 않은 우리의 식민성을 인식론과 세계체제의 차원에서 조망함으로써, 우리는 이 시대 가장 근본적인 해방의 기획이자 선언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