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임두빈 작성일 : 2018-06-18 19:52:40 조회수 : 3,634
국가 : 볼리비아 언어 : 한국어 자료 : 정치
출처 : 뉴스토마토
발행일 : 2017.04.07
원문링크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743605
원문요약 : 필자 임채원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했다. 현재는 동대학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재직하며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는 필자가 2년간 볼리비아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항해시대 이래 지속된 세계화의 그늘에 관해 <뉴스토마토> 지면에 격주 금요일마다 총 11회로 연재한다.
2016년과 2017년을 달군 광장의 외침은 새로운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이었다. 공화주의의 에토스가 폭발한 시민대집회가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수 있을까. 아니면 또 한 번의 미완성 과제로 남을 것인가. 1492년 지리상의 발견 이후 아메리카 신대륙을 놓고 두 개의 거대한 공화주의 실험이 전개됐다. 하나는 안정적인 공화정체를 만들어 세계 제일의 패권국가가 됐지만, 다른 한 곳은 신음하는 환자처럼 200년이 지난 뒤에도 불안정한 정치체제가 이어졌다. 공화주의 역사에 이런 극적인 대비가 있을까. 미국의 독립전쟁과 볼리비아 독립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지만, 그 행로는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 두 길은 2017년 대한민국에 역사의 지혜와 성찰을 던지고 있다.
 
비슷한 그리고 다른 미국과 볼리비아 '독립기념관'
 
미국 필라델피아에는 1776년 미국의 독립을 선언할 당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한 독립기념관이 있다. 볼리비아의 수크레(Sucre)에도 1825년 라틴아메리카 독립지사들이 모였던 '자유의 집(Casa de Libertad)'이 있다. 볼리비아 독립선언은 1809년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는 당시 회의를 했던 의자와 역사적 기록들이 있고, 볼리비아 자유의 집에도 당시 의자와 다양한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두 개의 독립전쟁은 30년 사이에 일어나 외형상 아주 유사한 모습이지만, 뜯어보면 볼리비아가 깊은 식민역사와 함께 역사적 유물의 향기를 물씬 풍긴다. 그래서일까. 수크레는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수크레만큼 아름다운 풍광과 쾌적한 기후를 가진 곳을 달리 찾을 수 없다. 수크레는 도시 전체가 16세기 바로크 건축양식을 간직한, 남미에서 가장 멋진 도시다. 건축물은 모두 흰색으로만 칠해졌고, 지붕은 바로크 양식의 붉은 기와로 뒤덮였다. 주변의 자연과 동화된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볼리비아 수크레(Sucre) 전경. 수크레는 16세기 바로크 건축양식으로 이루어진 백색 도시다.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지붕을 제외한 건물 외벽 색상은 흰색으로 규제하고 지붕은 대부분 남부 유럽처럼 붉은 기와로 덮었다. 도시의 중앙광장(La Plaza)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도시들처럼 큰 나무가 있는 공원이다. 다른 도시와의 차이점은 시청이 있는 자리에 독립기념관인 ‘자유의 집(Casa de Libertad)’이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수크레의 최대 자랑은 쾌적한 공기다. 해발 2500m 정도에 위치한 이 도시는 전형적인 남미의 상춘기후를 뿜어낸다. 이웃한 도시 코차밤바(Cochabamba)와 함께 남미에서 가장 상쾌한 공기로 유명하다. 다른 대륙으로부터 온 가톨릭 선교사들은 에스파냐어를 코차밤바의 어학원에서 배우고, 남미 각 지역으로 파견된다. 코차밤바에 에스파냐어 어학원이 자리한 이유는 늘 평온한 기후 덕분이다. 또 하나는 라틴아메리카 중에서 에스파냐어가 유럽 본토의 언어와 가장 비슷하게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남미의 각 도시들은 유럽인들이 이주한 지 300년이 넘어가면서 조금씩 토착화돼 에스파냐 본토의 언어와는 이질감이 생겼다. 반면 수크레와 코차밤바는 포토시 개발 때부터 에스파냐 귀족들이 정착한 곳으로, 이 두 도시의 말씨는 16세기 에스파냐어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바로크 양식의 세계문화유산, 백색 도시 수크레
 
라틴아메리카 이주사에서 수크레라는 도시의 탄생 배경도 특이하다. 이 도시는 대항해시대를 극적으로 진전시킨 포토시의 은광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포토시는 해발 4800m의 고지대인 까닭에 안데스 인디오들과 달리 백인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포토시 옆에 궁여지책으로 만든 도시가 수크레다. 무엇보다 기후와 연중 상쾌한 공기가 이 지역을 도시로 개발한 직접적인 이유다. 그 후로 포토시를 관리하는 에스파냐 관료들이 이곳에 정착했고, 수크레는 남미 최고의 도시로 떠올랐다. 브라질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지역에서 대표적인 도시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페루에 있는 리마다. 이 두 곳은 에스파냐 식민청이 있던 곳이다. 식민당국은 페루 지역 중에서 볼리비아를 '높은 페루(Alto Peru)'라고 불렀고, 리마에 있는 식민청의 관할 아래에 뒀다.
 
알토 페루에서 에스파냐 식민청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포토시 은광이었다. 여기서 생산된 은은 페루 리마로 옮겨지고, 파나마와 멕시코의 아카폴카를 거쳐 장구한 태평양 항로를 따라 필리핀의 루손섬으로 수송됐다. 수크레는 포토시를 관리하는 에스파냐 관료들의 가족이 정착한 도시였기 때문에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최고 수준의 문화를 누렸다. 바로크 건축을 비롯한 각종 문화양식이 수크레에 수입됐고,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의대도 생겼다. 바로크 건축의 아름다움은 남미의 조금은 외진 이곳, 수크레에 녹아들었다. 
 
볼리비아 수크레의 상징인 '자유의 집'. 1825년에 볼리비아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독립기념관이다. 사각형 둘레의 건물들에 독립과 관련된 유물과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전쟁과 분열
 
독립전쟁은 수크레의 관료들에 의해 주도됐다. 볼리비아 역사책은 독립전쟁이 1809년에 시작됐다고 기록한다. 1807년 나폴레옹의 조카 요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 본국을 점령하자, 이곳에 살던 에스파냐 후예들은 반발했다. 저항은 포토시와 수크레에서 행동으로 일어났다. 지금도 볼리비아 사람들은 그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에스파냐로부터 독립, 공화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다. 흔히 포토시 은광의 이해관계만큼 첨예하게 얽힌 정치상황이 갈등을 키웠고, 수크레에서 먼저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소개된다. 실제로는 수크레와 코차밤바 등에서 왕당파와 독립파의 내전이 시작된 것이지, 본격적인 라틴아메리카 해방운동이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에스파냐 식민당국에서의 실질적 해방은 멀리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일어났다. 1825년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가 독립을 선언했다. 이들은 미국 13개 주가 모여 미 합중국을 건설한 것을 본따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을 꿈꿨다. 볼리바르가 주창한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는 하나의 합중국 형태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 페루 그리고 볼리비아를 포괄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로 출발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인 해방자(El Libertador)들은 남미에서도 5개국에 해당하는 지역을 모두 합친 새로운 공화정체를 건설하려고 했다.
 
볼리비아 독립기념관인 '자유의 집' 중앙홀에는 독립 당시에 사용했던 의자와 테이블 등이 남아있다. 가운데 벽에 걸린 초상화는 왼쪽부터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시몬 볼리바르,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즈다. 이들은 볼리비아 독립 3걸로 불린다. 모두 대통령을 역임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해방자들을 지지한 알토 페루의 에스파냐 후예들은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시몬 볼리바르를 본떠 볼리비아로 바꿨다. 우리가 아는 볼리비아는 이렇게 시작됐다. 볼리바르는 1825년 페루와 볼리비아 지역의 통치를 친구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에게 맡겼다. 그래서 볼리비아 초대 대통령은 시몬 볼리바르이고, 두 번째 대통령이 수크레다. 새 공화국 수도의 이름도 수크레로 바꿨다. 
 
볼리비아와 주변국의 역사는 이때부터 더 주목할 일이 생긴다. 1776년 13개 주로 시작한 미 합중국은 점점 안정된 공화국으로 발전하면서 서쪽으로 확장해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 국가로 진화했지만, 장대한 민주공화정의 이상을 품고 출발한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은 이와는 다른 길로 나아갔다. 연방국가를 꿈꾸며 출발했던 그란 콜롬비아는 채 30년을 넘기지 못하고 5개의 나라로 쪼개졌다. 건국 아버지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이 일었고, 서로 암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새로운 공화국에서 누구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될까 서로 감시와 질시의 눈으로 바라봤다.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은 결국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로 갈라졌다.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은 통일이 아니라 분열의 과정이었고 반목과 갈등의 역사였다.
 
볼리비아 독립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을 지낸 시몬 볼리바르.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1825년에 '그란 콜롬비아' 라틴아메리카 합중국 출범을 주도했다. 그러나 담대했던 라틴아메리카 공화정체는 30년이 채 지나기 전에 붕괴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반복되는 정치 불안정의 라틴아메리카 공화정체
 
무엇이 미 합중국과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의 차이를 만들었을까. 생각의 차이가 거대한 역사의 차이를 빚었다. 미 합중국은 공화주의라는 끈끈한 접착제가 서로 이질적이었던 북미 대륙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하나의 국가로 묶어냈다. 반면 그란 콜롬비아는 그들을 이어주는 공통의 정치적 아이디어가 빈약했다. 공화주의적인 공공선에 대한 합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두 대륙의 역사가 달라진 것이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사실 그보다 150년 전부터 영국과 미국의 대서양 양안에서는 공화주의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했다. 1660년 청교도 혁명 당시 영국 자유주의자인 휘그(Whig)들은 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체가 새로운 대안이라고 믿었다. 이 시기 제임스 해링턴(James Harrington)은 16세기 이탈리아 도시공화정인 피렌체와 베네치아 모델을 영국에도 적용해보는 내용의 저작들을 세상에 내놨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부패한 궁중파(Court)를 반대하는 지방파(Country)에서 영국 공화주의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됐다.
 
공화주의에 대한 이상은 대서양을 건너 영국 식민지에서도 팜플렛 형태로 곳곳에 퍼져 나갔다. 뉴욕이나 필라델피아 같은 대도시에서부터 시골 농장까지 우편마차에 실린 팜플렛들은 구석구석 배달됐다. 지역이 달라도 새로운 공화정에 대한 의식만은 공유했다. 미국 건국에서 가장 큰 자산은 바로 공화정체에 대한 시민들의 이런 공감대였다. 이같은 정신적 토대 위에서 미 합중국이 건설됐다. 미국이 건국 이후에도 큰 갈등 없이 200년의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정신적 유산 덕분이다.
 
안데스 인디오들의 모습. 평균 해발 4000m 지역에 사는 아이마라 인디오와 상춘기후에 사는 케추어 인디오가 안데스 인디오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언어는 한국어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 언어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반면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에서는 공화주의에 대한 공통의 정신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 공유할 정신적 자산이 없는 까닭에, 서로를 불신하고 반목하는 일이 반복됐다. 정신적 이상이나 공유할 지향점이 있었다면 남미 해방자들이 동료들을 공공연히 암살할 일도 없었으리라. 볼리비아의 두 번째 대통령 수크레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볼리비아인들의 시기를 받아 암살당했다. 볼리비아에서는 수크레 이후에 1년 사이 무려 5명의 대통령이 이런저런 이유로 교체됐다. 때로는 암살당했고, 누군가는 쫓겨났으며 또는 정적을 피해 도망갔다. 그래서 볼리비아에서는 수크레 이후 4명의 대통령은 제외하고 7대 대통령인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즈(Andrés de Santa Cruz)를 3대 대통령으로 여긴다. 산타 크루즈는 볼리비아와 페루 연합국을 만들어 10여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볼리비아에 안정을 가져왔다. 
 
2017년 우리나라 광화문 등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시민대집회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보건대 새로운 공화정은 두 갈래의 갈림길에 서 있다. 미 합중국처럼 '시민적 덕(Civic Virtues)'으로 공동선에 합의, 통합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반면 공유할 정신적 토대가 허약할 때는 분열과 반목이 계속 재연되면서 소멸의 길에 접어들 수도 있다. 시민적 덕성과 공동체에 대한 합의로 성숙한 정신적 토대가 굳건히 형성됐느냐에 따라 다른 운명이 열리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도 포토시 은광과 같은 경제적 풍요보다는 시민들이 함께할 공동선에 대한 합의가 우선해야 한다. 미국과 볼리비아가 보여주는 역사적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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