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10 09:47:54 | 조회수 : 2,396 | ||||||||||||||
국가 : 멕시코 | ||||||||||||||||
정혜주(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유까딴은 멕시코의 동부, 미국 플로리다의 남쪽 과테말라와 벨리세와 접경하고 있는 반도이다. 유깐딴(Yucatan) 주, 낀따나로(Quintana Roo) 주, 깜뻬체(Campeche) 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고대 마야문명이 번성했던 곳으로 1519년 스페인의 침략자들이 올 당시에도 수많은 마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반도의 북쪽과 서쪽 해안, 메리다(Merida)와 깜뻬체(Campeche)를 중심으로 그 일대는 곧 스페인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으나, 일부의 마야사람들은 식민정치를 피하여 셀바가 깊은 치아빠스와 유까딴 반도의 동쪽과 남쪽에서 숨어서 살았다. 오랫동안 그들이 사는 곳에는 백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유까딴의 까스따 전쟁은 1847년에서 1901년 사이에, 멕시코의 유까딴 반도에서 마야원주민들과 라디노로 불렸던 백인계 지배층과의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다. 이 전쟁이 특별한 것은 1847년부터 1854까지 보여준 폭력성과 1854년에서 1901년 사이의 “말하는 십자가”를 따르는 원주민 공화국의 존재 때문이다. 까스따 전쟁이 터진 날은 1847년 7월 30일로 잡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독립을 하면서부터 멕시코 중앙정부의 한 주로 남고자 하는 중앙집권주의자와 유까딴의 독립을 외치는 연방주의자로 분리된 유까딴의 라디노 정치인들이 반목하면서 일으킨 전쟁의 용병으로 마야 원주민들을 끌어 들였기 때문이다. 7월 30일은 까스따 전쟁의 세 원주민 지도자, 마누엘 안또니오 아이(Manuel Antonio Ay), 하씬또 빠뜨(Jacinto Pat), 쎄씰리오 치(Cecilio Chi) 중에서 아이가 백인들에 의해 처형되자, 치가 보복을 목적으로 떼삐치 마을을 공격한 날이다. 유까딴의 현재의 역사는 까스따 전쟁의 정당성을, 비록 독립이 된 후에 일어났으나, 식민지 시절에 이루어진 백인의 압제에 대항하여 일어난 원주민의 반란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 전쟁에서 원주민이 승리를 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은 1847년 8월부터 1848년 2월까지, 불과 6개월 동안 백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 그 승리의 끝에 빠뜨와 치도 죽었다. 그들은 동족인 마야 사람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세 명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모두 죽고 전쟁은 더욱 혼란해졌으나 그들은 약 60년을 버틴다. 빠뜨의 부관이었던 호세 바레라가 멕시코 군대에 쫓기다가 찬 산따 끄루스(Chan Santa Cruz)에서 “말하는 십자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가가 발견된 작은 세노떼 안의 동굴 옆에 마을이 세워졌다. 순식간에 300호가 들어서고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로 “원주민 공화국”의 중심이 되었다. 무장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사체재와 “말하는 십자가”의 힘을 믿는 두 가지 요인으로 반란자들은 서로 다른 마을 출신지라는 반목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 합쳐졌다. 멕시코 중앙정부와 유까딴 주 정부의 군대는 끈질기게 공격을 하였다. 바레라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다 죽었다, 하지만 '말하는 십자가‘는 살아남았다. 찬 산따 꾸르스는 1901년이 되어서야 무너졌다. 기록에 의하면 전쟁에 참가한 자는 85,091명이며, 동쪽에 사는 거의 순수 마야 원주민 참가자는 11,000명이었다. 2009년 12월 30일, 깐꾼에 도착했다. 그리고 동쪽 해안을 따라 까릴료 뿌에르또(Carillo Puerto)로 갔다. 이 허름한, 작은 도시의 옛 이름은 ‘작은 성스러운 십자가’라는 뜻을 지닌 찬 산따 꾸르스(Chan Santa Cruz)였다. ‘말하는 십자가(Cruz Parlante)’를 모시고 있는 교회가 있는 곳이다. 여름의 더위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허름하고 삭막한 도시이다.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작은 십자가’, ‘찬 산따 꾸르스’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구릉진 석회암의 암반에 구멍이 뚫려 비가 고여 있고 사이사이에 오랫동안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사이로 마야의 초가집이 보였다. 그 옆으로 별로 크지는 않으나 말쑥하게 하얀 칠을 한 교회당이 있었다. 입구의 한편에는 검은 십자가 세 개가 그려져 있고, 다른 한 편에는 낀따나로 주 정부에서 인정하는 “말하는 십자가의 성소”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말하는 십자가는 전에는 노천에 있어서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성소라고 이름이 붙은 건물 안에 있어서 외부에는 볼 수가 없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가 보니 푸른 색깔의 십자가가 울퉁불퉁 돌로 쌓은 벽에 그려져 있었다. 이 초라한 십자가가 그 옛날에 50여년 가까이 마야사람들이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단 말인가! 물론 이 십자가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십자가 뒤에 누군가가 숨어서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허상은 그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마야사람들이 모이게 한다. ‘찬 산따 꾸르스’는 전쟁에 참가했던 주위의 마을에서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예배를 주관하고 십자가의 성소를 지키고 있다.
까스따 전쟁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인 하신또 빠뜨의 고향인 띠호수꼬(Tihosuco)는 그야말로 격전의 중심지였다. 그 이웃 마을인 떼삐치(Tepich)는 다른 한 명, 세실리오 치의 마을이다. 띠호수꼬에는 까스따 전쟁의 사람들이 모여서 저항을 하고 예배를 드리던 교회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포탄을 맞아서 윗부분은 날아가고 벽만 남았는데, 오늘날 지붕만 얹어서 마을 사람들은 예배를 보고 있다. 칸막이가 쳐져 있는 옆 마당에 검은 십자가 하나가 두 개의 붉은 창이 가로지르며 서 있다. 이것이 그 옛날의 성스러운 십자가이다. 무너진 벽 사이로는 하늘이 보이고, 임시로 덮은 지붕 밑이지만 교회당 내부는 아주 깨끗하고, 새로 그린 듯, 깔끔한 벽화가 양 벽에 그려 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상황, 예수가 설교하는 모습 등, 까스따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기독교의 전형적인 종교적 내용의 그림들이었다. 사람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무심한 세월처럼 무심한 사람들인가. 그러나 교회의 마당을 빠져나와 마을의 중앙광장으로 발길을 돌리면 멀리서부터 검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동상이 눈에 띈다. 맨발에 짧은 바지를 입고 마야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칼인 마체떼(Machete)를 비껴들고 있는 하신또 빠뜨이다. 광장의 모퉁이에는 길의 방향이 표시되어 있는데, 화살표 하나가 띠호수꼬 박물관을 가리키고 있었다. 까스따 전쟁 박물관이다. 안에는 당시에 썼던 녹슨 총들과 총알, 전쟁의 원주민 지도자들의 사진과 연필로 그린 얼굴들이 있다. 작은 우이삘에 세 개의 십자가를 수놓아 검은 십자가 위에 걸어둔 것도 있다. 박물관 그 어느 구석에도 원주민을 상대로 싸운 백인들의 모습을 기념한 흔적은 없다. 이곳에서는 마야원주민이 주인공이다.
하신또 빠뜨의 동상은 ??말하는 십자가‘만큼 허상이다. 그러나 마야 사람들에게는 아니다. 그들은 그 허상을 통하여 그들 자신을 보고 있고,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꿈꾸고 있다. 이쯤 되면 이 허상들은 허상이 아니라 실제가 된다. 십자가는 마야원주민들을 위하여 말을 하였고, 하신또 빠뜨는 원주민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위대한 영웅이다.
식민지 시절에 ‘동방의 술탄’이라 불렸던 바야돌리드는 까스따 전쟁이 일어나게 된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곳이다. 이 도시는 식민지 시절에 백인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지역으로, 원주민들은 들어갈 수 없었던 곳이었다. 따라서 전쟁 중에 가장 처절한 학살 사건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박물관에 걸려있는 그림이 바로 마야학회의 표지에 나온 까스따 전쟁의 모습이다. 박물관에는 바야돌리드의 역사와 까스따 전쟁의 발발과 추이가 사진과 함께 기록되어 있고, 전쟁 당시에 백인 정치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도 전시되어 있다. 물론 마야 원주민들의 삶의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야돌리드에서는 띠호수꼬와는 달리 까스따 전쟁을 역사의 한 부분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모양이다. 바야돌리드는 주위의 마을에서 가난한 원주민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동시에 가장 화려한 마야 원주민의 문화를 팔고 있는 곳이다. 독립을 통하여 원주민은 무엇을 얻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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