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10 09:47:29 | 조회수 : 2,561 |
국가 : 콜롬비아 | ||
차경미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보고타에서 버스를 타고 20시간쯤 왔을까? 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있는 안데스 산맥을 내려와 끝없는 평원을 달린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굽이쳐 펼쳐진 계곡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했고, 비스듬한 계단식 밭을 일구는 농부들의 모습이 넉넉한 저녁 풍경을 선사했다. 쉼 없이 달리는 버스는 마을을 지나고 또 지났다. 수많은 시간을 침묵하며 묵묵히 지키고 서있는 고목나무들도 차창 밖으로 스쳐갔다. 잠시 그 나무의 뿌리와 깊이를 헤아려 보았다. 너무나 작은 내가 보였다. 버스가 산길을 내려와 평평한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흑인과 더 많은 열대과일들이 스쳐갔다. 카리브 해로 다가서고 있음을 느꼈다. 짚으로 엮은 지붕과 벽돌 몇 장을 쌓아올려 만든 농가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고목에 매달아 놓은 흔들침대 아마까에 누워 몸 가는 대로 그리고 마음 가는대로 흔들대는 농부의 여유가 부러웠다. 마당엔 망고를 손에 입에 물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돼지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동생에게 젓을 먹이는 엄마의 주위를 맴돌며 관심을 끌고 있는 아이의 질투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런 아이들과 실갱이를 벌이는 엄마의 모습에서 행복이 보였다. 장시간의 여행으로 피곤에 지친 나는 차창 밖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함성에 눈을 떴다. “저기 좀 봐요?”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흥분한 어조로 밖을 가리켰다. 버스승객들 모두 어린아이처럼 소리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축제에 흠뻑 취한 도시 바랑끼야가 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바랑끼아는 카리브 해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카리브 해로 흘러가는 막달레나 강 서쪽으로부터 15킬로미터 떨어진 공업 도시다. 카리브 해 지역 공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보고따와 깔리 그리고 메데진에 이어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바랑끼아’는 협곡 혹은 벼랑을 뜻한다. 식민시대 스페인 정복자들은 막달레나 강 협곡 부근에 위치한 마을에 바랑까베르메하, 바랑까누에바, 바랑까비에하 등 ‘바랑까’라는 명칭을 공통적으로 사용했다. 도시는 전통의상과 가면을 뒤집어쓰고 음악에 몸을 맡겨 열정을 뿜어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흰 블라우스에 넓고 긴 플레이어스커트 그리고 각양각색의 꽃과 리본으로 머리를 장식한 소녀들은 화려했다. 그녀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삐에로들의 얼굴엔 미소로 넘실거렸다. 거리는 백인과 흑인, 노인과 아이 그리고 콜롬비아인과 카리브 해 인이 하나로 어우러져있었다. 버스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객도 운전사도 20시간의 탑승에도 불구하고 불평은커녕 오히려 즐거워했다. 매년 2월 초만 되면 바랑끼아의 거리는 어김없이 이런 상황이 되풀이 된다고 했다. 그들에겐 거리의 광기가 당연한 것이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바랑끼아 카니발 이야기로 가득했다. 카니발은 매년 2월 첫째주에 개최된다. 개막전 행사 준비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설레임과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도시로 들어오는 다양한 지역 사람들의 기대는 주요 뉴스였다. 카니발의 준비는 6개월 전 부터 시작 된다고 한다 합숙훈련과 테스트를 거쳐 최종 선발된 미인들이 미모와 재능의 경합을 펼치고 본격적인 행사는 사순절 4일 전에 꽃으로 장식한 차량과 함께 시대를 풍자한 시가 행렬로부터 진행된다. 다음날은 다양한 카리브 해 춤과 음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카니발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교통편과 숙박시설은 모두 예약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러나 카니발 마지막 날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차 안에서라도 축제를 즐길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창문을 열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에게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멋진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들의 열기를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을 사진으로라도 대신하고 싶었다. 정신없이 사진기를 누르다 앞에 앉아 있던 흑인 아저씨의 팔에 부딪혔다. 미안한 마음을 미소로 받아주는 넉넉함이 고마웠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몸에 걸치고 있는 신사복과는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가 도리어 나에겐 친밀감을 주었다. 바랑끼야 카니발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물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이 동네 골목에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장기자랑을 했다고 기억했다. 살던 동네를 물었다.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도시 남쪽동네에 살았다고 했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골목에 모여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고단한 도시의 일상을 위로 했다고 말했다. 동네골목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소통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무대였다. 잠시 말끝을 흐리던 흑인 아저씨는 다시 음악에 젖어들었다. 바랑끼아를 비롯한 콜롬비아 카리브 해 지역은 주로 흑인과 물라또가 거주한다. 15세기 이후 생김새는 같지만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 살아가던 다양한 지역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와 카리브 해에 정착했다. 그들은 사탕수수농장에서 원주민들을 만났고 유럽인들과 만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카리브 해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초기 이주해온 흑인들은 음악과 춤을 통해 가까운 기억속의 아프리카를 만났다. 음악은 희망의 미래였으며 절망과 분노의 표출이기도 했다. 노래는 신에게 구원을 외치는 언어였으며, 타악기를 통해 억제된 자유를 분출 시킬 수 있었다. 음악과 춤은 기록이었고 집단적 감정의 표현이었다. 바랑끼아는 독립이후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20세기 초 국가정책에 힘입어 공업도시로 성장하면서 도시는 이주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과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했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농촌을 떠난 농민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바랑끼아에 정착한 다양한 사람들은 동네 골목에서 만나 감성을 교감하기 시작했다. 골목을 통해 만남의 공간은 넓어져갔고 1888년 이러한 만남이 카니발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카니발은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여러 인종이 만나고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창밖은 다양한 분장으로 자신을 치장한 사람들로 분주했다. 카니발의 마지막 날이 여서일까?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듯 혼잡하고 현란한 거리의 음악은 사람들을 한자리로 이끌고 있었다. 왕자와 도깨비, 군인과 마법사가 하나로 어우러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그들의 감성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열정과 흥분으로 활활 타고 있는 도시는 어둠조차도 피해갔다.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시내 안으로의 진입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괴물과 악마 그리고 유명한 축구스타 발데라마의 노랑머리 가발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 자동차와 뒤얽혀 있었다. 혼돈조차도 자유롭고 자연스러웠다. 버스가 조금씩 움직이자 거리의 풍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음료와 술을 파는 까뻬떼리아는 밴드연주에 맞춰 어우러진 남녀노소로 붐볐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춤의 향연을 만끽했다. 카리브 해의 전통 음악인 손과 단손이 만나 탄생한 꿈비아와 뽀로스,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초적 색채를 담고 있는 격렬한 몸짓의 마빨레와 가이따스가 한 곳에 모여 지켜보는 이의 열정을 자극했다. 어느새 나는 그들의 살아 있는 감성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리듬에 몸을 맡기고 우리를 유혹하는 거리의 사람들이나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카리브 해의 어제와 오늘을 만났다. 춤과 음악을 통해 그들의 피 속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를 만났고 거리에서 전통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미래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고 있는 오늘의 바랑끼아인들을 만났다. 카리브 해의 어제와 오늘은 거리의 사람들을 통해 그렇게 지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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