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6:20:00 | 조회수 : 2,757 |
국가 : 아르헨티나 | ||
박보미(부산외대 글로벌지역대학원 박사수료)
첫 예수회 출신의 교황, 1282년 만에 탄생한 비(非)유럽권 교황, 2000년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시스코 성인 이름을 선택한 첫 교황, 권위주의적인 바티칸에 거센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교황, 국민과 SNS를 통해 소통하는 교황, 대중교통 애용자, 유명 축구팀 CA 산로렌소의 열렬 팬, 환경보호자, 빈민가를 떠도는 성직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베네딕트 16세의 뒤를 이어 2013년 3월 13일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선출된 지 2주년을 맞이한 제 266대 프란시스코 교황의 이름 앞에는 이토록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출처:http://z3news.com/w/pope-francis-setting-records-popularity-polls/)
프란시스코 교황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 1936.12.17. -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레스 지방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 회계사의 다섯 자녀 중 장남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할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왔고 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하고 나이트클럽 경비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생이 되었다. 1958년 예수회에 입문한 후 1967년 성 요셉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독일어와 이탈리아어에 능통하며,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73년부터 6여 년간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냈으며,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받고 주교품을 받았다. 이후 199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주교, 이듬해에 대교구장이 되었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되었고,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2013년 3월 이후 전 세계 12억 가톨릭 교인들의 수장을 맡았다. 현재 세계 가톨릭 인구의 1/3 이상이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교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대륙 전체 인구의 72%에 해당하며 전 세계의 42%를 차지하는 수이다.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행보 공식 교황명인 프란시스코는 이전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명칭으로, 이는 청빈, 겸손, 소박함의 대명사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역시 성 프란시스코처럼 평생 청빈한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주교가 된 후에도 주교관 대신 작은 아파트에서 지내며 전철 등 대중교통으로 출근하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겨했으며 비좁은 원룸에서 음식도 직접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이는 교황이 된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즉위식에도 이전 교황들이 사용했던 화려한 의자나 붉은색 교황용 모제타를 입지 않았고 하물며 순금으로 조제되는 어부의 반지를 은반지로 만들고 철제 십자가를 그대로 고수하였다. 또한 화려한 교황 전용 관저를 사양하고 다른 사제들과 바티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자신의 중고 자동차를 이용하는 등 검소한 삶을 실천해오고 있다. 그는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 애쓰지도, 야망을 품지도 않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정신을 가진 예수회 출신의 첫 교황이다. 이는 프란시스코 교황이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단순함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의 연장선으로 잇따른 파격(?)적인 행보의 배경이 되어준다. 또한 길을 지나가다가 피부병을 앓고 있는 병자에게 입을 맞추고 그를 위해 기도를 해주며 2013년 3월 로마 교외 한 교도소를 찾아 소녀 2명과 무슬림 2명이 포함된 소년원생 12명의 발을 씻겨주고 입맞춤하고 예배도중 한 아이가 스스럼없이 교황의 자리에 앉음을 저지하지 않는 행동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프란시스코 교황의 개혁의 바람은 마피아의 숨은 금고 및 돈 세탁을 한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티칸 은행의 투명성을 높이는 금융개혁을 하여 일반 시민과 바티칸의 내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외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
소통하는 교황 2013년 3월 프란시스코 교황이 선출된 이후에 전통적이며 권위적이고 신비주의였던 바티칸은 획기적인 개혁으로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SNS를 통해 교황의 근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닫혀’있던 바티칸이 노숙인 150명을 바티칸박물관 VIP투어에 초대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간미 넘치고 친근한 교황의 말과 행동의 일관성 있는 모습에 일반 시민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을 줘야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프란시스코 효과’라는 신조어가 탄생되게 하였다. 최근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에도 백악관 정원을 걸스카우트 캠핑장소로 이용하게하고, 40년 만에 일반 관광객들에게도 오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란시스코 교황은 가난의 문제에 대해선 대단히 급진적이지만 선진국에서 진보의 기준이 되는 사회 의제에 대해선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낙태, 동성애, 안락사 등 신학적 이슈에 있어서 강경 보수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낙태와 동성애 등과 관련해서 종교인으로서 신학 교리를 따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자유를 박탈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즉 다시 말해 동성 간 결혼은 반대해도 – 이 부분과 관련해서 아르헨티나 대통령과의 불화설이 있다 – 가톨릭신자나 종교인들의 동정애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나 미혼모 세례 거부 등에 대해서는 그들의 행동은 비판받아 마땅하나 그들을 심판할 권리는 없으며 이러한 차별행동을 비판하는 등 일정 부분에서는 진보적이라고 평가된다. 국제사회, 경제 정치 및 환경에도 관심이 많은 교황은 이전 교황들과는 다르게 민감한 사회적이고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실제적이고 연민어린 접근을 하였다. 2004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이자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시절 화재현장에 적극적으로 구조 활동을 펼쳤고 이후 피의자들의 심판에도 적극적인 모습에서도 나타났으며 교황이 된 이후 미국과 쿠바의 국교를 정상화 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여 이스라엘의 눈총을 받고 있다. 이처럼 이때까지 구체적인 사회적 문제에 종교인이 개입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프란시스코 교황은 “세계화는 우리를 이웃으로 만들었지만 형제가 되게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말로써 혹은 닫혀있는 바티칸 안에서 기도로만 바랄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옮겨야 할 때가 왔음을 보여준다. 이는 프란시스코 교황이 사제들에게 정치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정치적 생활은 공동선을 위한 다양한 방법 중 하나임을 가르치는 것과 일원화 된다.
이러한 열린 바티칸과 이색적인 교황의 행보에 대해 가톨릭교회 개혁을 향한 또 다른 청신호라는 찬사와 함께 환영하기도 하지만, 그의 종교적 정체성을 의심하는 비난의 눈초리와 미국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이 동시에 쏟아지기도 했다. 게다가 기후변화, 소득 불균형, 총기제조업 등 국제 사회의 이슈에 관해 소신 있는 교황의 발언에 대해 공산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교황으로서 그리고 한 종교단체의 수장으로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를 바라며 노심초사 하거나 교황의 공권력을 통해서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며 교황의 주관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처음’ 이라는 것은 수많은 이목이 집중되고 예상치 못한 시기와 장애물이 존재하며 기대치에 미치지 않은 낮은 결과들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코 교황은 선출된 지 2년이 지난 지금 꽤 많은 것을 실현해 왔다 ― 저자는 프란시스코 교황이 이루어낸 성과들보다 해방신학의 대가로서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앞으로의 그의 행보를 바라봐주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두려울 것이 없는’ 프란시스코 교황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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