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6:17:58 | 조회수 : 2,563 |
국가 : 멕시코 | ||
정혜주(前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일생 라사로 까르데나스는 1895년 3월 21일, 멕시코 미초아깐(Michoacá́n)주의 히낄빤(Jiquilpan)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당구장을 경영하여 시골에서는 제법 잘 사는 집이었다. 그리하여 형제들과 함께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가 15세였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인쇄소에 취직을 하였다. 그는 여기서 일생동안 영향을 주는 책들을 만났다. 이 인쇄소에서는 당시의 멕시코혁명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인민'이라는 잡지를 인쇄하고 있었으며, 혁명의 선언문을 인쇄할 정도로 개혁적인 것에 동조했던 곳이었다. 혁명에 대한 꿈을 키운 까르데나스는 1913년 7월 3일 사빠따군에 합류하였다. 글을 읽을 줄 알았던 덕분에 문서를 수발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으나 곧 전투를 하는 군인으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프란시스꼬 마데로, 에밀리아노 사빠따, 베누스띠아노 까란사가 서로 대적하는 혼란한 혁명의 상황에서 까르데나스 군대는 군사회의를 열고 약 250명의 장교와 사병이 토론하였다. 오브레곤과 까예스가 멕시코혁명을 완수하는 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자 그는 1915년 3월 27일, 까예스와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멕시코 혁명전쟁은 끝이 나고 까예스의 멕시코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1928년에 자신의 고향인 미초아깐에서 주지사로 선출되었으며, 1930년에는 당시 여당인 ‘민족혁명당’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34년 7월 4일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6년간 그는 열심을 다하여 토지개혁, 노동자 권익실현, 외국자본을 물리침으로 해서 멕시코 혁명의 목표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정치를 안정시키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멕시코가 라틴아메리카의 주도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1940년 대통령직을 물러나고서도 새 대통령 마누엘 까마초의 요청으로 1945년까지 국방장관으로 재직했다. 그 후에 빠스꼬아로(Pazcoaro) 호수 근처에서 살면서, 관개시설을 개선하고, 자선병원을 세우며, 외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을 교육했다. 지속적으로 국제적인 문제에 의견을 제시하였고, 인권을 변호하고,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를 다지는데 힘썼다. 그리고 75세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군인시절의 까르데나스(앞줄의 왼쪽) 원주민마을을 방문한 대통령 까르데나스(가운데)
멕시코 혁명에 생명을 불어넣다 멕시코시티 안에서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도로의 이름은 인수르헨떼스(Insurgentes), 라사로 까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그리고 뜰랄빤(Tlalpan)이다. 뜰랄빤은 그 지역의 원래 이름(나우아뜰)이고, 인수르헨떼스는 반도들이란 뜻으로 멕시코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걸어왔던 깅리다. 그리고 그 혁명의 이상을 실제로 옮긴 사람, 멕시코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라사로 까르데나스이다. 1911년 뽀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에 맞서서 일어난 멕시코 혁명은 거의 30년동안 지속되면서 100만 명 이상의 멕시코 사람들이 죽었다. 혁명은 사빠따(Emiliano Zapata), 빤초 비야(Francisco Pacho Villa), 마데로(Francisco Madero) 등 수많은 영웅들과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내었지만, 까르데나스의 등장이 없었다면 이 영웅들의 서사시는 결코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까르데나스는 혁명전쟁의 불이 퍼지는 1913년에 18세의 나이로 사빠따군에 자원하였다. 문서를 전달하는 일로 전사로서의 그의 경력을 시작하였으나 곧 군인으로서, 탁월한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무장을 하지 않고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가서 설득을 하는 대담한 외교가이기도 했다. 그는 줄곧 전장에 있었으나 싸움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았고, 포로들은 죽이지 않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적들조차도 그를 존경하였다. 1920년에 그는 최연소 장군이 되었고, 1928년에는 주지사로 선출되어 행정적으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주 예산의 46%를 교육에 투입하고 주 내의 학교 수를 두 배로 늘렸으며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대통령후보로 지목된 뒤에 그가 하는 선거운동도 이전의 대통령들과는 달랐다. 그는 스스로 국민을 찾아가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밝혔다. 1934년 7월4일, 그는 98.19%의 경이로운 지지율과 함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되자 그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장원을 없애고, 원주민 공동농지인 에히도(Ejido)로 나누어 주었다. 그가 농부들에게 나누어준 농지는 멕시코에서 경작이 가능한 땅의 대부분이었다.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전국에 학교를 세우고 보통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76.9%에 달하는 문맹이 58%로 줄고 초등교육을 하며 누리던 교회의 특권은 사라졌다. 다른 한편 노동운동을 지지하여 사용자들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스스로의 권익을 찾게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석유의 국유화‘였다. 까르데나스는 지하자원의 국유화를 선언하는 극단적인 방법 대신에 노동쟁의와 법정 대결을 통하여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이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막았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노동의 조건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1938년 3월 18일)에 ’석유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미국을 설득하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멕시코의 대표적인 정당인 PRI(Partido Revolucionario Industrial)를 만들었다. 그는 전사이며 외교가이고, 온유하지만 냉철한 판단력을 지니고 불굴의 의지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권력자이지만 시민들 사이를 거닐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또한 권력을 이용하여 재산을 불리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야기속의 주인공처럼,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모든 덕목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수많은 피를 흘린 멕시코 혁명의 목표였던, 농민과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정당한 권리를 실현하는 ‘개혁’이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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