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5:53:17 조회수 : 1,887
국가 : 브라질

 

김영철(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quimcarlos@daum.net


제뚤리우 바르가스(Getulio Dornelles Vargas)는 20세기 브라질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이었다. 1930년 혁명이후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했고, 1934년에는 헌정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37년에는 궁정 쿠데타를 통해 신국가 체제를 수립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제한적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1954년 사망할 때까지 집권하여 무려 19년간이나 브라질을 통치했다. 재임기간 브라질은 현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고 당시의 정치형태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30년 혁명은 표면적으로 선거부정에서 비롯되었지만 구공화정의 정치형태인 밀크 커피 과두정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 와싱통 루이스 대통령이 같은 주 출신의 줄리우 쁘레스찌스를 후보로 지명했고,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혁명의 기운이 브라질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선거제도에 불만을 가진 미나스 제라이스 출신 정치인들은 당시 중앙 정치권 에서 소외된 히우 그란지 두 술 출신의  


정치인들과 연합을 결성하여 자유연맹(Alianca Liberal)을 결성하여 바르가스를 대통령 후보로, 주앙 뻬소아를 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자유연맹은 소장파 장교(Tenentismo)들과 도시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대통령 선거는 예정대로 1930년 3월 1일 실시되었으며 상파울루 출신인 줄리우 쁘레스찌스가 당선되었다. 자유 연맹은 쁘레스찌스의 승리는 대통령의 비호와 부정 선거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3일 바르가스가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30년대 초반 브라질 정치는 유럽과 같이 급진화되었는데 좌익은 루이스 까를루스 쁘레스찌스를 중심으로 인민전선을 동원하기 위해 자유연합(Alianca Nacional Libertadora)를 결성했고, 1932년에는 통합주의라고 하는 파시즘 운동이 쁠리니우 살가두를 지도자로 하여 브라질 통합행동(Acao Integralista Brasileira)를 결성했다. 그리고 혁명정부가 조각되고 있던 1932년 상파울루에서 헌정혁명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가스는 1933년 5월 5일 제헌의회를 통해 신헌법을 공표하고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바르가스의 초기 집권은 다양한 엘리트 집단의 이익을 조절하는 느슨한 연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노동자들의 권리와 사회투자가 확대된 것으로 보였지만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산업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정치 연합은 부르조아지, 대농장주, 지식층, 소장장교, 여성그룹, 브라질 흑인 전선(Brazilian Black Front), 노동자 계급과 외국 자본가들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다계급적 연합은 민족주의와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으로 강화되었다.
바르가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1937년 10월 1일 상하원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1월 10일 의회를 회산시켰으며 동시에 사전에 작성해 놓았던 신헌법을 공포했다. 신헌법은 좌파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제한시키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킨 것이었다. 친위 쿠데타는 뻬르남부꾸와 바이아주를 제외한 중산층과 일반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신국가 체제는 국가비상사태의 선포와 함께 대통령령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여 권위주의적인 정치전통을 형성했다.

 



신국가 체제 헌법은 프란시스꾸 깜푸스가 제안한 것으로 폴란드 헌법에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폴라까(Polaca)”로 알려졌다. 바르가스는 신국가 체제 초기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고 브라질 통합주의 운동을 불법 운동으로 규정했다. 또한 의회를 설득하여 90일간의 계엄령을 발표하여 경찰력을 강화시켰다. 지지자였던 통합주의자들은 1938년 5월 11일 과나바라 궁을 공격하여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지도자인 살가두가 포르투갈로 추방되었다. 이로서 브라질에는 바르가스에 대항할 모든 정치조직이 사라졌다.
바르가스는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같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했고,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극적인 인생역전 경험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혁명이후에 보여준 것처럼 훌륭한 청취자였고 의문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정적으로 만들기 보다는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가스는 신국가 체제 초기에는 독재자로서 보다는 여전히 중재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신국가 체제 기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에 의존하고 중앙 정부의 행정 강화를 위해 테크노크라트들을 활용했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가스는 유럽의 파시즘과 미국의 뉴딜정책의 요소들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바르가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새롭게 시도하고 있던 조합주의를 도입했다. 바르가스의 조합주의는 북유럽의 사회조합주의 보다는 중앙정부의 통제가 용이한 국가조합주의를 형성했다. 브라질의 국가조합주의는 중앙정부가 노조 대표인 뻴레구(Pelego)를 통해 노동운동을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국가의 사회 통제력을 증가시켰다. 바르가스는 집권초기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지들을 배제시켰으나 신국가체제 말기에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농촌 프롤레타리아들로 참여를 확대시켰다. 이러한 조합주의는 자유방임적인 묵인을 피할 수 있었고 국가의 관리가 쉬웠기 때문에 수입대체 산업화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정착이 수월했다.
신국가 체제기간 브라질은 높은 경제성장과 많은 사회변화를 경험했다. 1930년 혁명이후 대공황의 영향을 받고 있는 브라질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1929년에서 1937년 사이 브라질 산업 성장률은 50%를 기록했다. 집권 초기의 산업정책은 생필품을 비롯한 소비재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1940년부터는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제철소, 항공기 제작 공장, 국립철강회사(Companhia Siderurgica Nacional)설립과 같은 중간재와 자본재 생산을 위한 공장을 건설했다. 바르가스는 문화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문화정책은 1930년 혁명이후 바르가스가 꿈꾸었던 브라질의 통일성과 일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1910년대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삼바가 브라질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브라질 각 지역에서 행해지던 카니발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것도 문화정책의 일안이었다.
1945년 10월 29일 군부는 바르가스가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을 요구했으며, 바르가스는 상보르자로 귀향했다. 바르가스가 물러난 이후 브라질 정치에는 3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첫째, 바르가스의 장기집권과 같은 개인적인 리더십에 의존하는 정치 행태가 다소 약화되었다. 둘째,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신헌법과 법률이 제정되었다. 셋째, 민주정치 회복으로 정치인들에게 많은 정치적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브라질은 1945년에서 1964년 극히 불안정한 다당제를 도입했다. 또한 권위주의적 정권, 경쟁적 다당제 그리고 군사정권 등의 여러 제도적 변화를 경험했다. 바르가스가 퇴진한 이후 브라질 정치는 크게 두 가지 분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신국가 체제 내에서 정치활동을 유지해왔다는 의미에서 규정된 ‘내부자(De Dentro)’와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외부자(De Fora)’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치구도에서도 여전히 바르가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유지되었는데 그가 귀향했던 상보르자는 브라질 정치인들의 메카가 되었다. 내부자들은 바르가스로부터 정치적 혜택을 입은 정치인과 관료, 산업자본가와 대토지 소유주 그리고 새로운 내부자로 성장한 도시 노동자등 세그룹으로 구분되었는데, 정치인과 관료, 산업자본가와 대토지 소유주는 1945년 민주사회당(PSD)를 창당했다. 바르가스는 두트라 후보를 지원하는 방법으로 PSD를 개인적으로 감독하고 있었다. 도시 노동자들은 브라질노동자당(PTB)를 결성했는데 이 정당 역시 바르가스의 최측근인 알베르뚜 마르꼰지스 필류가 장악하고 있었다.
1950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바르가스는 산업화 촉진, 사회보장법의 확대와 경제 민족주의를 포함하는 노동주의(Trabalhismo)를 선거 프로그램으로 결정했다. 노동주의는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노동자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중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조합주의를 변용한 것이었다. 이 선거에서 전체 투표의 49%를 획득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바르가스는 빈민의 아버지, 노동자들의 지도자 혹은 노동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 정치 지도자로 불리기도 했다. 바르가스는 취임이후 두트라 정부의 자 주의 경제정책을 강력한 국가개입을 전제로 하는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으로 대체했다. 이로 인해 외국자본의 투자위험이 높아져 신용도가 하락했다. 바르가스는 “석유는 우리의 것(o petroleo e nosso)”이라는 슬로건으로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여 1953년 브라질 석유공사(PETROBRAS)를 설립했다. 정부는 석유공사를 통해 브라질 정유, 정제 등 석유와 관련된 모든 산업을 독점했다.
바르가스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도시 노동자들을 이용했으나 당시 브라질 노동 부문은 독립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특히 1953년에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노동쟁의를 확산시켜 결국은 우익 진영의 반동을 자초했다. 이처럼 이념적 양극화가 악화되고 군부로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바르가스는 1954년 8월 24일 새벽 각료회의를 주도하던 도중 대통령궁에서 유서를 남기고 총으로 자살했다. 바르가스는 유서에서 정치적 현실과 1930년 혁명이후 자신이 걸어왔던 정치적 역경들을 들면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인 민족주의로 브라질 국민들에 대한 사랑을 밝혔다.
바르가스는 1920년대 브라질 정치와 사회 변화에서 소외된 엘리트들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1920년대 전반까지 자신이 브라질 정치의 중심 권력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1930년 혁명이후에는 소장파 장교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이는 혁명이후 브라질 엘리트들이 어떤 혁명적 프로그램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군부의 지원을 받은 바르가스는 1937년 친정 쿠데타를 통해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이러한 정치 과정은 민족주의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느슨한 형태의 민족주의는 분파화된 정치 행위자들을 규합하고, 통제하기에 가장 적절한 이데올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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