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레 북부 지역의 흥망성쇠를 다룬 문화인류학
개인사와 지방사로 돌아본 개발신화 탄생과 환상
칠레 북부 이키케 지역의 흥망성쇠의 문화와 지역개발신화를 다룬 문화인류학 책이다. 이키케는 칠레 북쪽 아타카마 사막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도시로 비옥한 남부지역과 달리 척박한 사막지역이어서 수천 년 동안 정착민이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키케 지역에 초석 붐(1879∼1929)이 불면서 경제부흥이 일어났고, 다른 도시의 이민자들이 유입해 오면서 척박한 도시에 항구와 지역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 그리고 이어서 미국의 투자가들은 내륙불모지에 광산을 세워 초석을 채굴, 수출하였고,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등에서 온 이민자들은 장사할 기회를 쫓아 이곳에 정착했다. 그러나 단일품목 생산 또는 단일 사업형태에 집중된 이곳 경제활동은 외부충격에 취약했고, 다시 쇠퇴기를 겪으면서 결과적으로 반복적인 흥망성쇠를 경험하게 된다.
군사독재하에 이뤄진 경제개발, 과열된 부동산 투기, 노동운동의 태동과 지역민의 국민되기 등은 머나먼 이국 땅 칠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에게 낯선 사건들이 아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현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칠레 북부 사람들의 개인사와 지방사, 역사를 한 편의 소설처럼 흥미롭게 풀어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 남아 있는 개발신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근대 국가발전과 지역민의 국민되기
이 책은 칠레 북부 지역의 역사를 국가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고, 선형적이며 발전지향적인 역사가 아니라 반복적인 흥망성쇠의 사이클을 토대로 지역중심의 서사를 제시한다. 국가에 대한 역사서술은 국가의 발전사를 다루는 것으로, 사람에 비유하자면 태어나는 시점에서 성장하는 과정, 질풍노도의 시기, 청년기, 그리고 발전의 열매를 맺는 성인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정리되어왔다. 전형적인 근대적 대서사들이 국가발전을 중심으로 서술되면서 수많은 목소리와 경험들이 사장되었다. 국가발전의 대서사도 일종의 근대적 환상이 아닐까? 이러한 서술방식은 국민국가의 ‘국민’이 국가의 발전궤도와 함께 발전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흥망성쇠를 겪은 이키케의 역사만 봐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순환적 사이클로 역사를 서술하면서 개발신화에 따른 일련의 과정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 개인사와 함께한 흥미로운 지방사와 역사
무엇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역사적 현장을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 나눈 삶의 이야기가 이 지역 역사, 지역과 얽힌 국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게 한 점이다. 과거 인류학은 지구 곳곳에 제국을 세우는 열강들의 편에 서서 그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미개한 것으로 규정하고 정당화하면서 탄생했다. 그러나 인류학은 인문사회과학의 한 분야이자, 타지역과 타문화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학문으로 정착되어왔다. 연구자가 오랜 기간 동안 현지조사를 하고 타문화가 자문화가 될 때까지 현지 문화에 몰입하는 것을 중시하며 그 경험 자체가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이다. 저자는 이 책을 에스노그라피 서술방식으로 , 즉 현지조사를 통한 생생한 경험과 함께 직접 사람들을 만나 삶 속에 담긴 스토리와 구전까지 섬세하게 다뤘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 책 인물탐색에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