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의 16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탐험은 대서양과 동양의 인도를 연결하는 ‘해협’을 구하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해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들이 탐험을 시작한 16세기 초에는 이미 우루과이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512년과 1516년 스페인의 항해가 J. D. 솔리스에 이어 F. 마젤란과 가보트가 우루과이를 탐험하였다. 그러나 갈라니 족(族)의 일파인 차르아족이 호전적이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식민이 진척되지 못했다.
1624년에 스페인이 우루과이에 정착하였다. 1680년에 이르자 포르투갈인이 브라질에서 이주하여 라플라타강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안에 사크라멘토 신(新)식민지를 열었고 이에 대항하여 1726년 스페인인은 몬테비데오를 건설하였다. 그 후 우루과이를 둘러싼 영유권 싸움은 1777년까지 계속 되었고,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몰아내면서 우루과이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루과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모두 몰살당하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과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왕조 전복으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는 독운동의 거센 바람이 불었다. 우루과이에서는 19세기 초 영국에 의해 짧은 기간 동안한 몬테비데오 점령이 있었고, 그 후 우루과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J. 아르티가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가우초의 지도자였던 아르티가스는 1811년 봉기하여 몬테비데오를 점거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영향력 약화로 우루과이를 브라질에 합방시켜 브라질령으로 만들었다. 그 동안 우루과이 내에서는 독립을 원하는 소리가 날로 높아져 1825년 J.A. 라바예하와 33명의 우루과이인이 인솔하는 독립군은 아르헨티나의 지지를 얻어 재차 주도를 탈환하였다. 1828년 이투사잉고 전투에서 우루과이가 브라질에 승리하면서 독립을 쟁취하고, 1830년 공화국 헌법을 발표하여 독립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후 초대 대통령 후루투오소 리베라의 콜로라도당과 2대 대통령 M. 오리베의 블랑코당의 대립으로 내분이 계속되었다. 또한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의 각축장이 되어 관심이 고조되는 한편 정국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이와 같은 내분 속에서 ‘대전쟁(1843∼1851)’이 일어났다. 영국·프랑스는 콜로라도당을 지지하고 아르헨티나는 블랑코당을 지지하였다. 적색당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지만 우루과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영향력 아래 계속 불안한 정치관계가 지속되었다.
1865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지지 하에 카우디요 플로레스가 집권 독재정권 시작했고, 이후 군인독재자가 연이어 부패된 권력정치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1903년 대통령이 된 J.오르도녜스는 1904년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후 플로레스가 수립한 콜로라도 정권의 재정비를 강력히 추진하면서 기간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 노인연금, 교육제도의 개혁, 정교분리 등을 추진하여 민주국가 우루과이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1917년 대통령제를 대신하는 집정협의회제의 일부가 실시되었다. 1934년 세계공황을 배경으로 테라 대통령의 쿠데타로 이 제도는 한때 중단되고 독재정치로 바뀌었다. 1952년 신헌법이 승인되어 9인 집정협의회에 의한 합의정치가 확립되었다.
1958년의 선거에서 적색당의 패배로 블랑코당이 집권하나, 인플레이션 등 경제 혼란수습에 실패하여 1966년 11월 선거에서 적색당으로 정권이 이양된다. 1967년 3월 대통령제로 복귀,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으로 남아메리카에서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는 민주적인 여러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남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충실한 사회정책을 실시하였지만,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군부의 정치 개입과 언론통제 등 정국은 다시 어수선해졌다.
공산당·사회당 전국노동자회의, 그 밖의 좌익 정치세력 등이 세레니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콜로라도당의 환 마리아 보르다베가 당선되었다. 보르다베리 정권은 급속하게 우경화하였으며 도시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Tupamaros) 인민해방운동의 박멸을 구실로 군사독재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1972년 4월 국회 승인을 얻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72년 말까지 게릴라를 진압한 군부는 1973년 6월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군사정권을 구축하였으며, 사회당·공산당, 그 밖의 반정부 세력의 집회를 금지하였다.
1976년 대통령선거를 둘러싸고 정권 담당자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보르다베리 대통령은 추방되었고, 같은 해 6월 국가평의회 의장A. 데미트리가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7월에는 군인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평의회가 블랑코당의 A. 멘데스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멘데스는 1977년 8월 신헌법을 1980년까지 제정하기로 하고, 1981년 11월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정(民政)으로 이관하는 등의 단계적 민주화 방침을 결정하였다. 1984년 11월 총선거에서 콜로라도당의 상나네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5년 3월 군정에서 민정으로 정권이 이양되었다. 1989년 L.A. 라카예가 대통령으로 당선, 정권을 승계하면서 많은 정치범들이 풀려나고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