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는 인디오들이 부족을 이루어 살며 정착하는 생활로 역사가 시작되었다. 잉카제국은 1480년 아르헨티나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북서부를 정복하였고, 과라니족은 고구마, 마테 등의 농업을 발전시켰다. 중부와 남부지역은 유목민들이 지배하였다. 1516년 유럽인들이 처음 도래했고, 1580년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식민지가 건설되면서 도시의 형성도 이루어져갔다.
1810년 5월 25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혁명을 일으켰고, 그 결과 1816년 투쿠만의회 소집을 통해 독립을 달성했다. 1829년부터 20년 동안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에 의한 공포 정치가 있었고, 1861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통합파 세력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때까지 오랫동안 연방파와 통합파 사이의 내전이 지속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방수도로 수립하고 명실상부한 근대공화국이 정립된 1880년부터는 이탈리아인과 스페인인이 대부분인 대량의 유럽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민해 왔다.
20세기 초 첫 10년간은 불완전한 시민법, 경제적 실패, 엘리트 지주들의 분개와 영국과의 이해관계에 대한 불신 등이 반복되면서 결국에는 1943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 시점에서 민족주의적 독재자 후안 페론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의 정부도 1955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진압된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는 '추악한 전쟁'의 시기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비델라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쿠데타로 삼군의 대표로 구성된 군사평의회 군정과 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정치적 불안이 지속된다. 그 사이에 1982년 국제 분쟁이 일어남으로써 말비나스 섬을 영국에게 빼앗기게 되는데, 아직까지도 이 섬의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1989년에 취임한 Carlos Saul Menem는 큰 경제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적으로 외국 투자를 개방하여, 5000%의 인플레이션을 현재 1%로 줄인 눈부신 업적을 세우게 된다. 1999년에 선출된 Fernando de la Rua대통령은 부패의 엄격한 단속과 아르헨티나 예산을 조절하기 위해, 국가세입의 철저한 조사를 내세웠다. 환율의 평가절하 덕택에 정부는 산업 부흥, 수입대체(import substitution), 수출 증가에 기반을 둔 새 정책을 실행했고, 재정과 무역 면에서 안정적으로 흑자를 보였다.
2003년 5월 사회민주주의 페론주의자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주지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키르츠네르 시기에 아르헨티나는 대부분의 채권에 높은 할인율(약 66%)로 채무 재조정을 하여 국제통화기금에 모든 빚을 갚았고 공익사업을 재조정하고 몇몇 이전에 사유화된 기업을 국유화했다. 키르츠네르와 그의 경제학자 특히 로베르토 라바냐는 강력한 소득 정책과 공공사업 투자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을 계속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네스토르 키르츠네르는 2007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 대신,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츠네르 상원의원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0월의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크리스티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직접 선거로 뽑힌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크리스티나 키르츠네르 대통령의 정당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농업 수출세 인상 계획을 펴다, 2008년 7월 16일 부통령 훌리오 코보스가 의회의 가부 동수(同數) 결과에서 여당에 반대표를 던져서 대통령의 정책을 좌절시켰다. 그리하여 3월부터 7월까지 농업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직장폐쇄로 맞서자 건실한 경제 성장은 급속히 퇴행하고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치자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남편이 취했던 정책 노선대로 경제의 문제 부분에 국가가 직접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 정권은 그다지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2011년 12월로 예정된 대선에 다시 키르츠네르 전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거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