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 몰아닥친 홍수와 열대성 폭풍 진(Tropical Storm Jeanne)에 의하여, 5,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2004년 2월 5일 《아이티 해방 재건 혁명 전선》이 북부의 마을 고나이브로에서 봉기 했다. 1994년 이후에 군의 해체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반정부 무장 세력에 대해 정부 측은 무력으로 충분한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2월 29일,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사임하고, 이웃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출국했다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망명했다. 아렉산드르 최고재판소 장관이 1987년의 헌법의 규정에 따라서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아리스티드 전대통령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있어 프랑스군의 보호 하에 들어갔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의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삼자평의회는 즉시 지식인 회의를 시작하여 유엔 사무국에 있던 라트르츄를 수상으로 지명하여, 정부를 구성했다.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유엔은 임시 대통령 아렉산드르의 요청에 근거하여 다국적 임시군(MIF)의 현지 파견을 승인했고, 3월 1일에는 미군을 주력으로 아이티에 상륙했다. 4월 20일에는 〈안보리 결의안 1542호〉가 채택되어 MIF의 후속으로서 브라질 육군을 주력으로 하는 《국제연합 아이티 안정화 미션》(MINUSTAH)을 설립하고, 치안 회복 등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여러 차례 기간 연장으로 2011년에도 활동 중이다.
2006년 재선거
2006년 아이티 국민들은 의회를 뽑았고, 2월에 대통령 선거를 통해 르네 프레발이 51%의 득표율로 당선하였고, 5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프레발은 가난한 아이티인들을 후원하는 희망당의 당원이었다.
2008년 폭동
2008년 포르토프랭스와 레카이에서 식품 가격의 인상을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의회는 자크-에두아르 알렉시 총리를 면직시키는 투표를 하였고, 9월 미셸 피에르-루이가 아이티의 두 번째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해에 몰아닥친 열대석 폭풍과 허리케인에 의하여, 수백명의 국민과 수천명의 노숙자들이 사망하였다. 고네이브(Gonaives)가 크게 파괴되었고, 아이티의 농업은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2010년 대지진
2010년 아이티 지진은 2010년 1월 13일 한국시각 오전 6시 53분 9초, 1월 12일 현지 시각 오후 4시 53분 9초에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아이티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 인근 지표면으로부터 13 킬로미터 깊이에서 발생했다.[1]
이 지진으로 아이티 대통령궁(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은 무사했다.)과 국회 의사당을 포함한 포르토프랭스의 주요 건물들이 붕괴했거나 손상됐으며, 감옥, 공항, 병원과 같은 시설도 폐쇄됐다.[2][3] 그리고, 포르토프랭스의 교도소가 무너져 약 4000명에 이르는 수감자가 탈출했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는 이번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구가 아이티 전체 인구의 1/3인 3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 바 있었다. 실제 사망자는 22만 명이 넘었으며 부상자 수는 30만 명에 달하였다.[4] 규모는 7.0이며 원인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 이 지역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지각판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북쪽에는 북아메리카판이, 남쪽엔 카리브판이 수평으로 엇갈리면서 10년에 20cm씩 이동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150년 동안 거대한 두 지각판이 3m 정도 움직이면서 쌓인 엄청난 에너지가 이번 지진으로 한꺼번에 분출된 것으로 분석된다.
2011년 대통령 선거
2010년 인기가수 출신인 미셀 마르텔리가 농민행동당(Repons Peyizan)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하여, 2011년 4월 20일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11년 5월 14일 수도 포르토프랭스 대통령궁 앞 광장에서 국내외 주요 인사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이티 대통령직에 공식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