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10 09:44:58 | 조회수 : 1,963 |
국가 : 멕시코 | ||
박종욱(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우이촐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EBS세계테마기행 <비바 멕시코>편의 출연자로 섭외되면서 부터이다. 그들에 대한 정보라곤, 달랑 몇 가지뿐이었다. 산간 오지에서 자신들의 삶의 전통적 방식과 의식구조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피상적인 정보 몇 개를 Fact로서 접하면서, 혹시 나도 서구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게 되면 어쩌나, 내심 불안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내 안에 '타자화의 시선'이나 '서구모방하기의식'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사실, 숨 가쁘게 조국 근대화를 겪고, 세계화와 글로벌 환경 적응하기에 길들여진 '나'와 '우리'가 아니던가. 멕시코는 오랜 역사와 광활한 영토만큼이나 지닌 이야기가 풍성하다. 21세기 글로벌 환경과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는 현대에도 멕시코에는 여전히 260여 원주민 종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미화하고 신화화하는 대중적 접근 방식의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그러한 원주민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오지라 할지라도, 상수도와 전기 시설을 비롯한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이 없이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실질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테펙에서 만난, 우이촐 사람들은 밝았다. 문화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안으로 확인하고, 밖으로 알리는 의도는 필자의 마음에 들었다. 멕시코 서부 나야릿 주의 주도인 테픽에는 정부의 원주민 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산간 오지에 흩어져 살던 우이촐족들이 많이 이주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립방안을 위해 상품화한 1mm 지름의 구슬을 꿰어 만든 차킬라 수공예 상품들은 정성이 가득했지만, 최근 중국에서 수입하는 유사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테픽은 주변에 화산 지형이 많은 약 900미터의 해발고도에 자리 잡은 식민도시이며, 기온이 온화하고, 멕시코의 다른 지역에 비해 적절한 습도와 풍성한 산림자원 덕분에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여전히 산간 오지인 아구아밀빠(Agua Milpa) 주변에 살고 있는 우이촐 족의 생활 여건은 한편으로는 종교문화를 중심으로 전통을 많이 보존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해야 할 만큼 경제적 곤궁을 겪고 있었다. 기본적인 전기 시절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었고, 지하수로 개발된 물은 위생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술사 로메오의 집에서 대접받은 또르띠야는 입안에 감도는 석회 맛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기 충분했다. 삶의 터전을 떠나, 도시의 집단 주거지역에 사는 우이촐 사람들과 산간오지에 살고 있는 우이촐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문명의 혜택에서는 외형적인 커다란 차이가 확연할지라도, 자신들의 뿌리와 문화, 그리고 종교적 의식과 의례를 향한 그들의 마음에는 다름의 판단을 적용하기 힘든 끈끈한 '그들의 방식'이 여전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드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이들 대부분 원주민 종족들은 저마다의 속도와 리듬으로 현대 문화에 적용하는 방식을 찾아가고 있으며, 비록 자신들의 토착언어와 문화를 꾸준하게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문화적 토대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원주민들의 숫자와 문화적 토대가 점차 사라지는 이유들 가운데에서도 현대화의 물결에 역행할 수 없는 최소한의 조건들이 있는데, 이는 바로 교육과 의료,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 등이다. 어쩌면, 원주민들의 삶은 외형적으로 멕시코 서민들의 삶과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다는 편이 옳을 수도 있겠다. 추수 의식인 에스끼떼 행사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그들의 자연과의 교감과 삶의 지향점은 '태양'과 '사슴'과 '뻬요떼 선인장'을 중심으로 여전히 자신들의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채 스스로의 생각과 의식 속에 삶의 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이촐족은 멕시코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약 오만 명에 이를 만큼 그 세가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주민들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전통적 삶의 가치를 잃지 않은 채, 자기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자긍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의식의 문제가 아닐까. 자신들의 삶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것들에 자신을 맞춰가지만, 무리하지 않는 리듬과 속도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긍정적 혼종성Positive Syncretism'이 아닐까. '나'의 삶의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서 나를 반추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성찰의 순간은 아닐까, 우이촐 족과의 만남은 세계와 글로벌에 취해있던 내게 성찰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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