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라키스 작성일 : 2011-05-03 13:59:03 조회수 : 899
관타나모 수용소 캠프 X-레이
(관타나모 美해군기지<쿠바>=연합뉴스) 안수훈 특파원 = 미국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설치한 쿠바 내 관타나모 수용소 가운데 제일 처음 수감자를 수용했던 캠프 X-레이로, 현재는 폐쇄돼 잡초만 무성하다. 2011.5.3 <<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 ash@yna.co.kr


국경지대에는 지뢰밭과 선인장 장벽
미군-쿠바군, 국경에서 매달 정기 회담
기지 내 쿠바 실향민촌 마련돼 거주 중

(관타나모 美해군기지<쿠바>=연합뉴스) 안수훈 특파원 = 관타나모는 미국과 쿠바가 국경을 접하며 대치하는 곳답게 곳곳에 삼엄한 경계활동이 이뤄지는 등 긴장감도 자못 감돌았다.

   산꼭대기에는 전기를 공급하는 4개의 풍력발전 터빈 바람개비가 한가로이 회전을 하며, 관타나모만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산 곳곳에는 미사일 기지로 보이는 시설 등 미군의 각종 군사시설도 엿볼 수 있었다.

   쿠바와의 국경인 북동쪽으로 이동할수록 야산 곳곳에 미군 경비 감시탑이 설치돼 있었고, 중요 시설은 이중 삼중의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또 해안으로의 적 침투에 대비해 미 해안경비대 경비정이 매일 정기적으로 해상을 순시하며 경계를 하고 있다.

   기자가 관타나모의 최초 수용시설이던 캠프 엑스레이 방문을 위해 국경 부근으로 이동할때는 해병대의 사격훈련으로 출입이 일시 통제되기도 했다.

   미국과 쿠바는 이미 1962년 10월22일부터 11월2일까지 11일간 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경험한 바 있다.

   기자를 안내한 미 육해공군 및 해병대 합동 태스크포스(JTF-GTMO)의 공보 관계자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관타나모 주민들은 소지품은 여행용 가방 하나만 갖고, 강아지 등 애완동물은 마당에 묶어놓은 채 신속하게 공항으로 나오라는 통보를 받고 대피해야 했다"고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미국과 쿠바 국경지대
(관타나모 美해군기지<쿠바>=연합뉴스) 안수훈 특파원 = 미국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설치한 쿠바 내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북동쪽의 미국과 쿠바 국경지대 모습. 2011.5.3 <<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 ash@yna.co.kr


 쿠바정부는 1961년 관타나모 국경 17마일(27㎞) 지역 주변에 철책을 설치했고, 일부 지역에는 선인장을 집중적으로 심는 `선인장 장벽'(Cactus Curtain)을 통해 쿠바인들의 관타나모 행을 막았다.

   특히 쿠바군은 국경선을 따라 선인장 외에 지뢰를 대거 심었고, 미군도 이에 맞서 지뢰를 심어 미-쿠바 국경에는 한때 5만5천개의 지뢰밭이 조성돼 한국의 비무장지대(DMZ) 다음으로 지뢰가 많은 곳이라는 오명을 갖기도 했다.

   미국 측은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지뢰를 대부분 제거했고, 현재는 무인감시 카메라 등으로 국경을 수비하고 있다.

   쿠바와 미군은 각기 국경에서 약 1.6-2.4km 떨어진 곳에 철책선을 설치해 놓고 경비를 서고 있다. 미군은 정예 해병대 병력이 주둔 중이고, 쿠바는 최정예 `국경수비여단'이 전방수비를 담당해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한 남북대치를 연상시키고 있다.

   기자를 안내한 게리 켈리 상병(여)은 "국경지대에서 좀 낙후된 경비 감시탑은 미군의 것이고, 최신형으로 보이는 경비탑은 쿠바군의 것으로 보면 된다"며 웃었다.

   미군과 쿠바군은 수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대표자 회담을 갖고 양국군간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노엘 웨스트와 멜라니 레스토 씨
(관타나모 美해군기지<쿠바>=연합뉴스) 안수훈 특파원 = 쿠바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내 쿠바 커뮤니티에서 만난 노엘 웨스트씨(오른쪽)와 쿠바 커뮤니티센터 관리자인 멜라니 레스토씨가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1.5.3 <<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 ash@yna.co.kr


익명을 요구한 해군 관계자는 "국경을 지키는 미군과 쿠바군의 대령급 대표가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회담을 갖고 국경지대에서 우발적인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의하고 있다"면서 "산불, 지진 등 자연재해 발생 시 공조방안도 논의하며, 회담이 열리지 않는 기간에도 서로 이메일을 통해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전했다.

   양국 군 대표들의 회담은 서로 양쪽 국경지대를 오가며 열리고 있어 한반도의 판문점 내 평화의 집과 통일각에서의 남북 군사회담을 연상시켰다.

   쿠바혁명 이전까지 수천명의 쿠바인들은 관타나모로 출퇴근하며 생업에 종사해 왔으나 공산정권 출범 이후 차량통행이 금지됐고 이후 쿠바인들의 관타나모 출입은 거의 완전히 차단된 상태이다. 쿠바 정부는 다만 상징적으로 나이가 든 주민 3명에 한해 국경통행을 허용했으나 작년 연말 한 명이 병사해 현재는 단 2명의 쿠바인이 매일 관타나모를 오가며 일을 하고 있다.

   현재 관타나모에는 공산혁명 이후 관타나모에 잔류한 쿠바인과 1994-1995년에 어선을 타고 쿠바를 탈출한 주민 등 30여명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쿠바판 `실향민촌'이 형성돼 있다.

   `쿠바 커뮤니티'에서 만난 노엘 웨스트씨(76)는 "쿠바 공산혁명 전까지 나는 미 프로야구 엘에이 다저스팀의 팬일 정도로 쿠바와 미국은 같은 생활권이었다"면서 "고향이 구아로(Guaro)라는 곳으로 관타나모에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1964년 관타나모에 정착한 이후 한 번도 고향에 가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웨스트씨는 그러나 북한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던 한필화 씨가 1990년 일본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 북한대표단 임원으로 참가했다가 남한에 살고 있던 오빠 한필성 씨와 극적으로 상봉한 사실을 기억할 정도로 남북대치 상황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관타나모 해군기지 쿠바 실향민 마을
(관타나모 美해군기지<쿠바>=연합뉴스) 안수훈 특파원 = 쿠바 내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있는 쿠바 실향민 마을. 2011.5.3 <<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 ash@yna.co.kr


그러면서 "마이애미를 거쳐 쿠바를 방문하는 길이 열려 있지만 쿠바정부를 믿을 수 없어 가지 않는다"면서도 "죽기 전에는 한번 가보고 싶다"며 실향민의 아픔을 표시하기도 했다.

   쿠바 커뮤니티 센터 관리자인 멜라니 레스토 씨(여)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미국인으로 대구에서 2년간 청소년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레스토씨는 "쿠바인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이곳에 모여 도미노 게임도 하며 실향의 슬픔을 달래고 있다"면서 "경조사에는 반드시 함께 모여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와 미군 당국도 관타나모 내 쿠바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직장알선과 건강보험 혜택 등 다양한 혜택 그리고 장례식 때는 미군 의장대까지 보내며 각별하게 지원하고 있다.

   ash@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5/03 10:00 송고

원문보기 :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1/05/03/0607000000AKR201105030067000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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