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중에는 그 기원이 모호하거나 인류 역사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아주 짧은 시간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파고들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급기야는 그것이 빠진 식사는 먹은 것 같지도 않게 생각되는, 이른바 늘 먹어야 하는 음식의 위치까지 오르기도 한다. 감자가 바로 그러하다.
안데스 산록에서 잉카인들의 식량이었던 감자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 안데스의 보물 감자만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처음엔 관상용의 정원 식물로, 또는 최음제로 오인된 감자는 정작 식용 단계에 이르러서는 악마의 식물이라 하여 심한 배척을 받는다. 서구인들은 감자를 두려워했고, 불신했으며, 멸시했고, 비웃었다. 하지만 춥고 습하고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는 이 강인한 식물은 소작농의 대체식량으로, 또 투기 자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감자는 여러 삶의 곤란을 해결해 주었다.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의 식량으로 시간, 공간, 노동, 연료 부족 문제들을 해결했다. 넓게 보면 감자는 인구폭발과 기근에 영향을 끼쳤고, 좁게는 토지의 이용과 가사일에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감자를 매개로 해서 이 작은 일상을 파고들었다. 저자는 농부, 부뚜막, 공문서와 회상록, 연료와 부엌세간 따위의 자질구레한 자료들을 들춰내 묻혀 있던 우리 일상생활의 미세한 역사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먹는 음식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그 음식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선택한 음식을 통해 그 당시의 역사를 재현해내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감자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어서 아주 오래 전부터 있던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감자는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200년 정도밖에 안 된 작물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에도 유럽에 감자가 전해진 역사는 불과 400년 남짓이고, 본격적으로 보급된 역사는 300년 정도이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에 감자가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유럽의 인구증가, 해외이민, 산업혁명, 도시 노동계급의 증가, 생활 형태의 변화 등등의 얼마나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는지 모른다. 일상성 때문에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이 드러나지 않는 감자의 역사를 담은 책을 내고 싶었다.
감자를 우리 나라에 대입해 놓아도 결코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우리 생각만큼 그때보다 변한 것이 없다. 3백 년 전의 유럽의 농가 풍경이나 초라한 부엌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던 우리의 근대사와, 그리고 지금도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와 북한을 떠올리면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역사이다.
본격적으로 감자가 보급된 지 150년 남짓하지만 이제 감자는 우리에게 일상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런 일상성 때문에 감자의 과거를 주목하지 않는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우리 감자 이입사(移入史)도 이렇게 꼼꼼히 정리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펴낸다. 더 나아가서 모든 일상의 세밀한 부분을 포괄하는 깊이 있는 책들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감자는 한 식물종에 불과하지만 현대사의 전환점에서 드러나지 않게 큰 역할을 해냈다. 이런 미세한 일상생활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간략하게나마 우리 감자의 역사를 '조선의 감자'라는 장으로 첨부해 놓았다.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살아 있는 감자의 역사를 가지게 되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