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풍요는 무엇을 밟고 서 있나
제3세계의 불과 대여섯 살의 아이들이 힘겨운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보통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아이들을 구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똑같지 않아서 그 어린이들의 노동을 옹호하는 목소리 역시 존재한다. 이런 사실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흑인 노예의 납치와 수송, 그리고 착취에도 이러 저러한 옹호와 합리화의 논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노예제가 폐지된 후 가장 빠르게 노예로 흡수된 계층은 어린이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린이들의 노동을 이용하는 일에 대한 여러 논쟁들이 다시금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세상의 아이들??은 단지 어린이 노동을 용인하는 나라들을 비난하거나, 아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전반적인 빈곤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원인을 규명해온 저자는 지금까지의 어린이 노동에 대한 모든 논의를 소개하면서 그와는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한다. 우선 저자는 18∼19세기의 영국의 어린이들과 오늘날의 제3세계 아이들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듯이 이야기 하는 그들이, 사실은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바로 ‘우리 아이들’임을 밝혀낸다. 그리하여 현재 어린이를 이용하는 국가들은 그들이 덜 문명화되거나 특정 문화와 종교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을 밟고 부를 축적한 서구의 성장경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을 뿐이며, 어린이 노동은 선진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을 지적한다.
어린이 노동 문제의 해결책들
??다른 세상의 아이들??은 어린이 노동에 대한 서구의 해결책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논하는데, 자신의 아이들을 일터로 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들의 가난과 부당한 보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그들의 아이들만 유해한 노동환경에서 빼내겠다고 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사실 어린이 노동을 해결하겠다는 서구의 논의들은 그 원인과 결과가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모순을 이루고 있다. IMF 등의 국제금융기관이 가난한 국가들에 부과하는 소위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핵심은 시장기능의 확대와 국가지출의 감소이다. 국가가 자국민의 복지, 건강, 교육, 영양분야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많은 어린이들이 해로운 노동시장으로 유입된다. 그런데 해결책이라는 것이 바로 그 세계화와 자유시장에 의한 부의 창출밖에 없다고 주장된다.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다국적 기업과 민간주체들이 마음껏 활동하도록 놔두면(즉 부유층이 한없이 부유해지도록 하면) 빈곤층은 조금 덜 가난해지며, 결과적으로 상대적으로만 가난해져서 어린이 노동이 없어진 다는 것이다. 모든 대안들은 사라지고 아이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원인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과연 성장에 의한 문명화가 야만을 사라지게 했는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두바이 인공섬은 오늘날 세계가 가진 기술적 진보와 문명을 한눈에 보여준다. 하지만 남아시아의 많은 아이들이 납치되어, 혹은 몇 푼의 돈에 팔려와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낙타기수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몸이 가벼울수록 더욱 선호되므로 겨우 3∼4세의 아이들이 낙타위에 밧줄로 묶여 경주를 한다.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비명은 낙타를 자극해 더욱 빨리 달리게 만들고, 밧줄이 풀리면서 죽는 아이들도 발생한다. 물론 낙타 등에 올라타기를 거부하는 아이에겐 매질이 가해진다. 경제성장과 기술진보에 의한 부의 창출이 모든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은 비현실적이며, 근거 없는 희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지속적인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이 이미 지구적 한계에 부딪치고 있지만, 여전히 ‘분배’라는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구 어린이들의 ‘정상적’인 환경
??다른 세상의 아이들??은 우리가 정상적이며, 당연히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서구 어린이의 성장 환경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최상층을 제외하면 어린이들이 일한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오늘날 남반구의 어린이들과 같은 호되고, 착취적인 노동과는 달랐지만 말이다. 사실 오늘날 서구가 정한 ‘일과 완전히 분리된 유년’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최근에 창안된 것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사회적인 직분이나 기여도는 전혀 없이, 소비자로서의 권리만 갖는다는데 있다. 극소수 최고 시장결정권자가 내린 결론 안에서 성장, 발전해야 하는 서구의 아이들은 제3세계 아이들이 돌을 깨기 위해 망치를 잡는 그 나이부터 소비의 주체가 되며, 이것으로 노동하는 아이들과 소비하는 아이들은 불가분의 운명체로 묶이게 된다. 소비주의의 덫에 빠진 아이들은 남아시아의 아이들 못지않은 착취와 학대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과로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소비의 욕망을 가진 어린이들 사이에 분명 일과 여과의 적절한 균형이 있을 테지만,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들에겐 이 양극단의 세상이 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세상의 사람들’
저자는 너무 꼼꼼하다 싶을 정도로 그가 만난 모든 아이들과 빈민들의 이름, 나이, 가족사항, 떠나온 고향, 하루 노동시간과 수입액을 일일이 밝혀 놓았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가 그들을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와 똑같이 이름과 가족이 있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같은 세상’의 사람들이라고 여겼으면 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이와 함께 벽돌을 깨며 하루에 800원 남짓을 버는 한 엄마(‘베이비 베굼’이라는 이름을 가진)는 이제껏 자신의 이름보다 딸들의 이름으로 더 많은 돈을 저축했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내 딸들에게는 미래가 있잖아요. 앞으로 결혼도 해야 하고.” 이 어머니를 누가 ‘다른 세상의 어머니’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불과 한 세대 전에 겪었던 그 뼈저리게 아픈 얘기들(고향을 떠나온 이주민, 학교에서 끌려나와 농사일을 시작한 소년들, 끊임없이 돌아가는 재봉틀 앞의 소녀들)이 여전히 그곳에서, 더 혹독한 모습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헤쳐 나온 그 공포와 고통의 시간을 그들의 연약한 어깨위에 옮겨놓고는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다른 세상의 아이들’은 되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