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념사 연구는 인문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전체의 역사'를 시도하는 지적 작업이다!
1863년 9월 10일은 동 • 서양 개념 충돌의 역사적인 날이다.
중국 주재 미국 공사관의 중국어 통역관이자 선교자인 마틴이 휘튼의 국제법 저서를 한역한 초본을 들고 톈진의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방문하였다. 이 날의 만남으로 <만국공법>이라는 전대미문의 서적이 발간되어 동 • 서양 국제정치 개념 충돌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만국공법은 19세기 중엽 이전 우리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 현살들이 전파되면서 충돌을 빚었던 생소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만국공법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한반도에 전파, 인식되는 과정을 추적한 이 책은, 그것이 또한 오늘의 우리 현실임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19 • 20 • 21세기는 동시대적임을 일깨운다.
3. 한국개념사의 대장정을 알리는 ≪만국공법≫
그동안 개별연구자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개념사 연구를 국내 최초로 본격화시키는 ≪한국개념사총서≫는 앞으로 10년에 걸쳐 수행될 방대한 학술 사업이다. 이번 학술 사업은 지난 150년 동안 우리 학문 세계를 지배하고 충격을 준 기본개념 50개 항목을 선정하여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계획인데, 그 대장정의 막을 여는 첫 번째 책이 이번에 출간된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다.
19세기 말 한때 유행하던 용어인 만국공법은 일본 학계에서 사용하던 국제법이란 호칭에 밀려 학계에서 사라진 진부한 고유명사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이질 문명권의 정신구조들이 서로 충돌하던 19세기 조선≪만국공법≫ 초판본 사회에서 서양의 공법과 동양의 예(禮) 질서의 충돌을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현실 인식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으로 동북아 질서에 충격을 던졌다고 말하는 ≪만국공법≫은 과연 어떤 번역서였는가? 먼저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질서 개념을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설명한다. 즉, 중국중심주의의 사대 질서와 유럽중심주의의 공법 질서가 충돌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사대 질서를 유지해 온 기본개념은 사대자소(事大字小: 소국은 대국을 섬겨야 한다는 예 관념), 조공(租貢: 소국은 대국에게 조근할 의무가 있다는 관념),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 제후의 신하들이 다른 제후와 비밀리에 접촉할 수 없다는 관념), 이적(夷狄: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 천하(天下: 사대 질서의 명분체계가 타당하다고 인식하는 장소의 관념)라는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는 19세기에 접어들어 유럽의 공법 질서와 충돌하면서 파괴된다. 19세기 유럽의 국제법이란 유럽의 법이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법이며,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의 법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는 제국주의적인 법을 말한다. 이는 실정법주의, 유럽중심주의, 팽창주의에 입각한 폭력의 규범이었다.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던 유럽의 국제법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도 유럽의 세계 팽창을 합리화하는 법적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대 질서와 공법 질서의 서로 다른 개념은 1839~1842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발생한 아편전쟁을 통해 충돌하게 된다.
아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린쩌쉬(林則徐)는 서양의 국제법 관련 글을 한문으로 번역함으로써 이제 두 문명권은 번역을 통해 충돌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충돌은 미국 선교사인 마틴(W. A. P. Martin)이 유럽 문명권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합리화하는 국제법 이론가인 휘튼(H. Wheaton)의 ≪국제법 원리≫를 ≪만국공법≫이라는 제목으로 한역(1864년)한 이후의 일이다. 마틴은 ≪만국공법≫ 영문 서문에서 국제법 지식이 없었던 중국을 돕고자 하는 순전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이 책을 번역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서유럽 국제법 이론이 중국에 전파된 이후 중국은 반(半)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번역의 본래의 의미가 굴절되어 새로운 현상을 일으킨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개념이 된 경우이다.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개념사 연구’를 제안하며
한림과학원 ≪한국개념사총서≫는 학술진흥재단 인문한국(HK) 지원사업의 일환으로서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호소통사업’을 위해 기획되었다. 철학, 문학,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과 정치, 경제, 사회, 법학 등 사회과학의 기본개념정리를 통해 인문학의 기초연구에 기여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근대 논의의 새로운 담론 지형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문학의 미래지향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림과학원의 ≪한국개념사총서≫ 편집위원회는 한국 인문․사회과학 개념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를 19세기 중엽으로 설정한다. 이로부터 1950년까지 100여 년 동안 한․중․일 동북아 3국은 유럽의 이질 문명을 만나 새로운 개념의 충돌, 투쟁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충돌의 혼란은 냉전체제 아래 지속되어 과거완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개념사 정리의 당위성은 강조된다. 기본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비학문적인 방법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학문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그간 오해되고 굴절되거나 사라진 개념들에 대한 학문적 통찰이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혼선을 빚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인문․사회과학 개념의 인식 및 복원은 인문학적 토대를 다시 세워 ‘전체의 역사’를 시도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한마디로 ‘개념사 연구’란 21세기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