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도시 부산의 근대영화사
『부산근대영화사-영화상영자료(1915∼1944)』는 1915년부터 1944년까지 부산의 13개 영화관에서 상영된 영화 14,697편의 목록을 수록함으로써 근대 부산의 영화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 원장이 쓰고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엮은 이 책은 마이크로필름화된 당시의 일간신문에서 일일이 상영자료를 찾아내는 지난한 작업을 통해 목록화한 것으로, 근 30년 동안 부산에서 상영된 총 영화상영자료를 수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처음 전해진 극장 태동기에서부터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부산에 설립되기까지의 과정 등 부산영화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기존 영화사의 오류까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이 책은 한국영화사에서 부산이 차지했던 비중이 대단히 컸음을 드러내고 부산영화사의 가치를 제대로 자리매김한 성과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이크로필름화된 일간신문을 통해 기초자료 발굴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발행된 전국판 일본어 일간신문 <부산일보>와 <조선시보>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부산근대영화의 모든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70년대부터 한국영화 자료 발굴과 보존에 헌신을 다해온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 원장은 마이크로필름화된 이 일간신문에서 부산영화의 상영자료를 찾아내는 힘든 작업을 수년간 계속해왔는데, ‘로컬리티 인문학’ 연구를 진행 중인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를 만나면서 이 자료들은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보래관, 욱관, 부산좌, 행관, 상생관, 국제관, 태평관, 수좌, 중앙극장, 소화관, 부산극장, 대화관, 부산공회당 등 13개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총 14, 697편의 상영일자, 상영극장, 작품명, 작품명 번역, 장르, 권수, 감독이나 배우 등 기타 정보를 날짜별로 수록한 이 책은 720여 쪽에 이른다.
희극왕 찰리 채플린의 인기는 그 시대에도 대단
희극왕 찰리 채플린의 인기는 그 시대에도 대단하여 <채플린의 가짜(替玉)>, <제2철방 채플린>, <채플린의 게으른 계급>, <채플린의 월급날>, <채플린의 나무망치>, <채플린의 어깨총>, <채플린의 개의 생활>, <전선의 채플린>, <출세일대기>, 고아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 유리창을 깨고 유리장사를 하는 <키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구두를 삶아 먹는 <황금광시대>, 다시 3년 후 내놓은 <서커스>까지 상영됐다.
뿐만 아니라 채플린과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희극왕 해롤드 로이드, 절대 웃지 않으며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던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도 상영되었고, 루스 롤랜드, 찰스 허치슨의 연속활극물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일제말기에는 전쟁 홍보영화를 지속적으로 상영
또한 1937년 7월 27일 중일전쟁 발발로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령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일지교전을 촬영한 전쟁뉴스 영화를 지속적으로 상영함으로써 이들 뉴스 영화를 통해 황군신민화를 주도면밀하게 강요하는 구실을 만들어나갔다. 영화의 제목도 <일장기 펄럭이다>, <남경총공격>, <함락특보>, <입성> 등을 붙여 일본의 승전보를 실시간 알리는 식의 상투적인 수법을 강조했다. 전쟁 대비에 명분을 실은 <부산방공 실습실황>을 수시로 촬영, 상영하였고, 1939년에 친일영화 이익 감독의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는다>, 야마나카 감독의 <바다의 빛>이 소화관에서 처음 상영된 후, 광복기까지 친일영화가 매우 빈번하게 상영되었다. 이 자료들은 1930~40년대 부산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식민정책과 침략전쟁의 교두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그런 상황은 1940년대 들어서도 여전했음을 말해준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극장문화를 꽃피운 부산
부산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극장문화가 시작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22개의 극장이 존재했을 정도로 극장문화가 꽃핀 곳이었다. 일본식민지로부터 광복을 맞기까지 부산의 극장문화는 대중문화를 이끈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주식회사 형태의 규모를 갖추고 자본금 75,000원, 불입금 18,750원을 출자하여 1924년 7월 11일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된 곳도 부산이었다. 중심의 영화사에서 늘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온 부산 지역을 근간으로 하는 영화 자료들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이 책의 커다란 의의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요 성과
첫째, 부산영화라는 지역성을 뛰어넘는 역사 지평의 확대이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영화사의 기술이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부산근대영화사』는 이런 고정관념이 깨질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홍영철 씨는 황성신문(1903년 6월 23일자 광고)을 근거로 삼아온 1903년 최초의 영화상영 시기보다 1년이 늦긴 했으나, 부산(행좌, 송정좌 상영)에도 영화가 들어왔고, 1907년 7월 15일 부산좌라는 극장이 서울의 단성사보다 이틀 앞서 부평동에 개관하였으며, 1919년 10월 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와 함께 선보인 <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단성사)보다 무려 1년 8개월 앞서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부산 경성의 전경>이 부산에서 상영되었음을 밝힘으로써 이를 뒷받침하였다.
둘째, 지금까지 한국영화 역사 연구자들이 간과했거나 놓친 부분에 실증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이다. 그 한 예로, 기업형태를 갖추고 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대한 기존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환기시켰다. 그가 새로 발굴한 자료(조선은행회사 요록)에 따르면, 조선키네마(주)의 설립일이 1924년 7월 11일이며, 공칭 자본금이 지금까지 알려진 20만 원보다 훨씬 적은 7만 5천 원이라는 것이다.
셋째,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를 열고 있는 부산의 영화사적 의미와 배경을 자연스럽게 부각시킨 점이다. 조선키네마(주)는 당연히 부산영화의 모체이자 한국영화의 젖줄이다. 이 영화사는 <해의 비곡>(1924)을 비롯한 네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윤백남, 안종화, 이경손, 나운규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은막의 개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부산이라는 지역을 넘어 한국영화의 중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