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의 스캔들'
예부터 일본에서는 번역 문물이 중요한 존재였다. 일본문화는 그 심층부에서 외래문화와 절충 융합되면서 성립되었는데, 그 근간이 된 것이 외래 문물의 번역이었다. 번역은 일본문화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번역사의 지위도 서양에 비해 낮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이론화는 그에 걸맞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언어학이라는 서양의 과학에 있어서도 번역학은 오랜 기간 제대로 대접 받지 못했다. 번역의 이론화, 번역론을 과학으로서 구축하는 것이 좀처럼 어려웠기 때문이다. 언어학의 입장에서 보면 번역은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이었고, 또 실제 번역하는 입장에서 보는 언어학은 추상론에 불과했다. 번역은 경험의 영역이지 이론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시의 번역은 번역사의 시적 재능의 문제이고, 희곡의 번역은 연극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 하는 극본쓰기(Dramaturgy)이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통역(구두 번역)의 분야는 아직도 이론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통역이 통역사의 자질이나 경험, 기술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으며, 동시통역시의 청취과정(인지)에 대해 인지심리학과의 연계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이론화가 이루어진 정도이다.
언어학자 무냉은 '번역의 존재는 언어학의 스캔들이다'라는 도발적인 발언을 했다. 그는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들』(1963)이라는 훗날 번역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논문에서 '언어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번역의 이론적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번역이라는 범주 안에서 언어이론의 유효성을 의심하거나 양자택일이 되어 버렸다'고 말하고 이 '스캔들'을 해결하기 위해 번역을 언어학 속에 포함시키려는 작업을 했다. 번역은 언어의 문제이며 번역론은 언어학의 한 분야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번역을 단순하게 언어학의 문제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제한 조건이 너무나도 많다. 번역론은 언어학을 기반으로 하지만 언어학을 초월하는 부분을 가진 과학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방법으로는 주로 언어가 가진 논리 그 자체를 중시하는 방법과 언어논리를 초월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에 집착하면 '번역불가능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번역론은 번역불가능론을 극복하는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새로운 번역과학에서는 '모든 것은 번역 가능하다'라는 원칙이 인정된다. '사각형 모양의 삼각형'처럼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않다면 무엇이든 번역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듬직한 이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정한 절차를 밟으면 모든 문헌과 모든 텍스트를 간단히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번역이 곤란한 경우,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번역능력 함양을 위한 모국어 이해
외국 서적을 번역본으로 읽었을 때에는 뭔가 흐릿했던 것이 원전을 보니 명확해지더라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원전을 읽는 것이 더 나으며 번역은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구문 파악을 못했다던지 뉘앙스의 차이를 잘못 처리하는 등 어학능력의 문제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여 근본적으로는 '이문화간 교류로서의 번역'이라는 점에 유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질 높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한 번쯤 번역이론을 배워 두는 것이 결국에는 지름길이 된다. 번역 불가능성에 대한 문제는 이론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가? 그보다 번역의 원리란 어떠한 것인가?
외국어 지식만으로는 번역론을 알 수 없다. 번역이 두 언어를 사용하는 것인 이상, 외국어를 번역하는 데 필요한 세세한 기술에 관심을 쏟기 이전에 모국어와 외국어의 언어적 특성을 한 번 비교해 둘 필요가 있다. 두 언어가 얼마나, 또한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다른가를 의식하는 것은 진정한 번역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유익할 것이다. 평소에 언어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이문화 커뮤니케이션이란 정말로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 문제의식은 번역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밝혀냄으로써 번역의 원리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문화는 무엇보다도 언어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는 우선 일본어에 대해서 번역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도록 한다. 특히 영-일 통사구조를 자세하게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 책의 구성
번역론의 기본적인 테마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면서 번역의 실전적 지식을 도출한다. 각 장의 처음에 '이 장에서 다룰 내용'을 정리하여 전체 개요를 제시했다.
제1장과 제2장에서는 번역이란 어떠한 행위인가를,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원점에서 논하고 있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번역을 이문화 커뮤니케이션으로 설명하고 일본어와 유럽 언어(영어 등)를 비교하면서 번역이 두 언어문화(세계관) 사이의 교류라는 점을 조명한다. 이 책이 단순한 번역기술이 아니라 언어론 내지는 이문화 커뮤니케이션론, 비교문화론으로 읽혀지는 것은 이 부분 때문이다. 제5장에서는 번역이론을 실전에 응용해 보고, 제6장에서는 대상 텍스트의 종류는 번역론상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텍스트 유형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번역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특히 문학 번역에 대해서 자세히 고찰한다.
부록에서는 번역 이론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독자를 위해 중요한 번역론언어론을 소개한다. 코세리우는 번역론에 있어서 틀리기 쉬운 네 가지 포인트를 지적하고 있으며 실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의 고토바(Kotoba)론은 일본어와 유럽어를 비교한 것으로, 번역에 대한 흥미진진한 힌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