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우리 시대의 이론가 이진경이 모리스 블랑쇼 이후 현대 사상에 전면적으로 부각된 '외부' 개념을 통해 현대 사상의 중요 거점들을 연결하는 지도 그리기를 시도한 것으로, '외부성의 사유'라는 새로운 유물론의 장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 1부에서 이 지도는 하이데거, 레비나스, 블랑쇼, 푸코, 들뢰즈 등을 거쳐 다시 맑스와 스피노자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거기에서 내재성의 장과 만나고, 내재성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임을 확인한다. '정치철학에서 외부성의 문제'를 다룬 2부에서는 아렌트와 아감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을 '외부' 개념에 의해 정리하면서, '외부성의 정치학'을 말한다.
'외부성의 사유'로 직조한 현대 사상의 태피스트리!
―이진경이 말하는 새로운 유물론과 외부성의 정치철학!
머무름 속에 스스로를 가둔 것, 그것은 이미 굳은 것이다 ;
그와 같은 초라한 잿빛 멍에를 쓰고도 안전을 꿈꾸는가?
―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중에서
우리 시대 가장 독창적인 이론가 중 한사람인 이진경이 3년 만에 전작 <외부, 사유의 정치학>을 펴냈다. 이 책은 블랑쇼 이래 철학적 사유의 주요 개념으로 떠오른 '외부' 개념을 통해 현대의 주요 사상가들의 사유를 연결하며, 맑스의 역사유물론과 들뢰즈의 내재성 개념으로부터 이진경의 '외부성의 유물론'을 추출한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또한 이 책 2부에서는 현재 주목받는 정치철학자들(아렌트, 아감벤, 랑시에르)의 사유를 '외부' 개념을 통해 정리해 내며, '유물론적인 의미에서의 정치'를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
사실 '외부'는, 이진경이 <철학의 외부>(그린비, 2002)에서 전면적으로 사용한 이래 그의 사유의 기본에 자리 잡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사유 자체의 내적 성질로, 혹은 인간이나 주체 자체의 보편적 양상”으로 사유에 절대적 형식을 부여하고자 하는 '내부성'의 사유와 달리, 그 사유가 근거하는 외적인 조건, 즉 외부에 의해 사유하고 외부에 열려 있기에 늘 변화하고 변이할 수밖에 없는 '관계'와 '사건'의 철학적 개념이 이진경이 말하는 '외부'이다.
“이미 들뢰즈나 푸코 등의 저작에 익숙해 있었지만 이전에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외부' 개념에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은 유물론에 대한 나름의 새로운 정의 덕분이었다. 눈을 돌리고 나니 외부라는 개념이 많은 현대 사상가들에 의해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유물론을 정의하면서 사용한 외부의 개념과 그들이 사용하는 외부의 개념은 어떤 공통된 것이 있으면서도 때론 크게 때론 작게 어긋나 있었고, 또 그들 사이에서도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상이한 양상의 외부 개념이 모두 '유물론'과 결부될 수 있는 것인지, 결합될 수 있다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인지, 아니면 유물론을 외부 개념을 통해 정의하는 게 과연 적절한 것인지 등의 질문을 던져야 했다.”(본문 34쪽)
이와 같이 '외부'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사람은 물론 이진경만이 아니지만,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진경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맑스적 의미에서의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물음 속에서 '유물론'을 다시 사유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만난 것이 '외부'라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그가 정리하며 사유하는 이 책의 '외부' 개념, 오늘 우리가 만나는 새로운 유물론으로서의 '외부성의 사유'는 이진경의 독창적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지식계의 고무적인 현상은 서구의 중요한 철학자들의 사유를 해석하고 소개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사유의 영향을 받되(그렇지 않은 사유란 사실 존재할 수 없다)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설득력 있게 펼쳐 가는 지식인들을 우리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지식인의 한가운데 이진경이 있다.
현대 사상에서 외부의 개념들 ― 외부에 의해 사유한다는 것
칸트와 헤겔의 시대, 다시 말해 서구 의식이 역사와 세계의 법칙을
'내면화'시키는 일을 더없이 정언명령적으로 요구하던 때…….
― 푸코, 「바깥의 사유」(김현 편,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191쪽)
이진경이 '외부'의 사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혹자들은 '외부'를 사유하지 않는 사유가 있을 수 있냐는 비판을 제기했다. 이는 이진경이 말하는 '외부의 사유'가 '외부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외부에 의한 사유'라는 점을 제대로 읽지 못한(않은?) 오해에 근거한 비판이다. 모든 사유는 당연히 그 밖에 대한 사유다. 데카르트가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며 서구의 근대철학을 입론한 이래 칸트와 헤겔 등 거장들의 사유가 대상으로 삼은 것은 '외부'이다. 그러나 푸코가 말했듯이 그들은 '외부'를 “역사와 세계의 법칙”으로 “내면화”(내부화!)하는 것, 거기에 보편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에 반해 이진경이 말하는 외부에 '의한' 사유란, 어떤 것의 본성이 불변하는 고유의 것이 아니라, 외부라는 “뜻하지 않았고 뜻대로 되지도 않는” 외부에 의해 그 본성이 규정된다는 사유 방법이다.
이진경이 이렇게 '외부성의 사유'로 현대 사상가들의 계열을 살피며 <외부, 사유의 정치학>에서 거론하는 사상가들은 하이데거, 레비나스, 블랑쇼, 푸코, 들뢰즈이다(그 이전에 내부성의 사유의 계열로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거론하고 있다). 이들의 사유를 짚으며 '지도그리기'에 나선 이진경은 1부의 결론으로 들뢰즈의 내재성과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 그리고 맑스의 역사유물론이 만나는 새로운 유물론으로서 '외부성의 사유'를 주장한다.
?'외부' 개념 부상의 분기점, 하이데거?레비나스, 그리고 블랑쇼
블랑쇼처럼 자신의 담론을 부정하는 것은
그 담론을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바깥)로 내보내는 행위이며…….
― 푸코, 「바깥의 사유」(김현 편,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193쪽)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자가 등을 돌리는, 밖으로부터 들이닥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라는 사태를 통해 외부성의 문제를 사유하고자 했다. 이런 하이데거의 사유는 외부와 내부가 모든 지점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런 그의 사유는 제자이기도 했던 레비나스, 그리고 블랑쇼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외부'에 대해 사유하도록 촉발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비록 외부를 현존재로 하여금 존재의 진리로 향하게 만드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사유하긴 했으나, 그렇게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나의 외부에 자신을 여는 탈자적 본질의 존재론이 내가 속한 세계(고향)를 위해, 나와 공동으로 존재하는 현존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윤리학으로 귀결되고 있다. 요컨대 하이데거에게 있어 내부와 외부는 구별불가능할 정도로 혼재되어 있으나, 외부와의 만남이 본질적으로는 '안에-있음'으로 귀착되는 존재의 목소리로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사유가 '내부'를 향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하이데거의 사유에 영향을 받았지만, 또한 그의 사유와 대결하면서 사유의 방향을 외부로 돌려 놓은 사상가들이 바로 레비나스와 블랑쇼이다. 이진경은, 하이데거와 철저히 대결하면서 절대적 외부와 절대적 타자를 향해 나아갔던 레비나스가 “다시 한번 방향을 틀어 주체성과 타자성의 변증법적 종합”을 향해 나아가 또다른 주체철학의 길로 들어서고 만 데 반해, 블랑쇼는 “절대적 외부를 향해 곧장 나아간다”고 말한다.
블랑쇼는 흔히 은둔의 철학자, 염세주의적 (문학)비평가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푸코나 낭시 등 현대 사상가들에 의해 다시 주목받고 있는 문학가―철학자이다. 이진경 역시 블랑쇼를 다시 독해하면서 블랑쇼에게 중요한 것은 외부를 절대적 극한에서 사고하는 것이었고, 그의 부정성은 사실 삶에 대한, 존재에 대한 놀라운 긍정을 향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 이진경은 블랑쇼가 말하는 공백/공허가 중관철학의 공(空) 개념과 닮아 있음을 느끼며, 그의 '텅 빈 공허'란 사실 도래할 모든 규정들에 대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내재성의 사유, 외부의 사유 ― 들뢰즈와 맑스, 그리고 스피노자가 만나는 장
이 책에서 이진경이 '외부에 의한 사유'의 계열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상가는 앞서 말한 블랑쇼와 뜻밖에도 들뢰즈다. 들뢰즈는 사실 '외부성의 사유'를 이야기할 때 이진경이 늘 거론한 사상가이기에 이번 책에서의 거론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이진경은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과 '외부' 개념을 연결하는 데 난점을 겪게 된다(이 책 서문 6~7쪽 참조). <차이와 반복>에 사용된 잠재성 개념과 ??천의 고원??에서의 외부 개념이 이어져 있다고 보였는데(실제 들뢰즈 자신이 푸코에 대한 책에서 외부 개념을 명시적으로 말하는데 거기에서 그 개념은 잠재성과 이어져 있었다), 그 두 저작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간극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진경은 이 저작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의 절반 이상을 써야 했다고 고백한다.
이진경은 들뢰즈에게서 구조화를 향하는 초험적 잠재성과 모든 현행적 돌발에 열려 있는 사건적 잠재성의 두 가지 잠재성 개념을 보면서 들뢰즈에게서 '외부'의 개념에 부합하는 잠재성은 후자임을 논증한다. 잠재성 개념이 중요한 것은 “외부 개념이 가장 적극적으로 작동하는 개념적 장(場)”인 '내재성의 평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내재성 개념은 여러 전공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듯이 '안에 있다'는 '내부성'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내재성은 “어떤 것도 불변의 본성 같은 것은 없으며 그것과 관계된 것, 관계된 양상에 따라, 즉 그 외부에 따라 본성이 달라진다”고 보는 사유방식이다. 모든 것을 외부에 의해 사유하는 것이 내재성이며, 따라서 “내재성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이다.”
이진경은 이 들뢰즈의 내재성 개념을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라는 맑스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접속하는 관계에 따라 본성이 변하는)과 연결시키고, 여기에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을 연결해, 하나의 새로운 외부성의 사유의 장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나아가 이 사유의 장에 불교의 중관학과 화엄학에서 이야기하는 연기적 사유를 끌어온다. 알다시피 연기(緣起)란 어떤 것도 그것에 기대어 있는 조건, 즉 외부에 기대어 있기에 조건이 달라지면 그 본성도 달라진다고 보는 사유란 점에서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맑스와 스피노자, 들뢰즈, 중관학?화엄학이 만나는 하나의 장,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요약한 이 장에, 이진경이 붙이는 이름은 “외부성의 유물론”이다(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진경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유물론은 '물질'의 선차성을 인정하여 그것에서 본성을 파악하려 한다는 점에서 외부를 대상화시키는 '내부성'의 사유라는 점이다).
정치철학에서 외부성의 문제 ― 아감벤과 랑시에르의 경우
<외부, 사유의 정치학> 2부에서 이진경이 다루는 것은 '외부성의 사유'로 정치를 사유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 그는 최근 가장 논의가 활발히 되고 있는 정치철학자 아감벤과 랑시에르를 적극적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각각 근접한 방식으로 또는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근본적으로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영역, 즉 공론의 영역인 폴리스(정치)와 사적 영역인 오이코스(가정경제)가 근대로 들어오면서 사적인 이해관계가 정치의 장을 지배하게 되어 두 영역이 뒤섞여 버렸다고 비판한다. 즉 순수 정치의 영역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삶(bios)의 영역인 폴리스를 오이코스가 장악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진경은 이런 아렌트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는 것이고, 오이코스에 속한 사람들(먹고살기 위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정치에서 배제시키며, 사유하는 자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내부성의 정치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런 사유가 어떻게 '불멸성'을 논하는 초월성의 철학으로 이어지는지를 자세히 분석한다.
아감벤은 오이코스와 폴리스를 구분한 아렌트의 입론을 조에(날 것의 삶, 벌거벗은 생명)와 비오스(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특정성이 유지되고 존중되는 삶)라는 대립적인 생명 개념을 통해 변형된 형태로 밀고 간다. 그는 '호모 사케르'(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일 수는 있는 신성한 생명)라는 개념을 통해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외부를 말함으로써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지대를 주목하게 했다. 그런데 아감벤은 프랑스 인권선언이 태어났다는 순수한 사실 자체로부터 인권의 원천을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날 것의 삶이 근대 국민국가의 기초가 됨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 '날 것의 생명', 즉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난민 또는 이주노동자를 바로 연상시키는 이 개념어가, 사실상 국민 전체로 확장되어 버려, 그 개념적 특정성이 소멸되어 버리게 된다. 게다가 이 극단적 부정성의 형상(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날 것의 생명!) 밑에서는 동정과 분노는 일지만, 어떤 능동적인 힘(상황을 타개할 실천)도 발견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랑시에르는 정치를 폴리스의 자격 있는 자들의 행위로 제한하려 했던 아렌트에 반대하여 그런 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police)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진정한 정치란 권리가 있는 자와 없는 자, 말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몫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르는 그런 구획을 교란하고 뒤흔들어, 볼 수 없던 것을 보이게 하고,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의 감각을 변환시키는 것이다. 이진경은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의 사유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할하는 체제에 대해 작업한 푸코의 사유와 겹쳐지며, 또한 비가시적인 힘을 가시화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할 때의 들뢰즈?가타리와 이어진다고 하면서, 이들의 작업을 '외부성의 정치학'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유물론, 새로운 정치철학
통치할 자격을 갖지 못한 데모스(demos)가 지배하는 체제가 데모크라시(democracy)이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시작 없는 시작이며, 지배하지 않는[지배할 자격이 없는] 자들의 지배다.” 그에게 정치와 민주주의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자격 없는 자들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정의상 자격 없는 자들의 지배가 민주주의라면 사회 전체를 규정하는 체제가 민주주의가 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그들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면 그것은 곧 자격 있는 자가 치안을 하는 체제가 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진경은 질문한다. “외부자가 외부에 남으면서 가동시킬 수 있는 정치는 있을 수 없을까? 더 외부로 나아가는 외부자의 정치는?”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민주주의란 도래할 체제로서 추구되지만, 결코 도래하지 않을 미래의 체제라는 것이다. 즉 어떤 민주주의의 승리에도 멈추지 말고 다시 시작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승리하는 순간, 추구하던 것이 이루어진 순간, 빠져들게 되는 내부화의 힘에서 벗어나 다시 외부성을 가동시키며 내재성의 장을 형성하는 정치. 영구혁명의 정치. 이런 정치를 사유하며 이진경은 말한다.
“정치를 사유하는 것에서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외부에 의해 정치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정치적 과정을 하나의 내재성의 장 속에서, 외부와의 만남이나 대결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반전되거나 발산하는 내재성의 과정 속에서 사유하는 것을 뜻한다. 외부성의 사유, 외부성의 정치학, 그것은 우리의 결론이라기보다는 낡은 의미의 정치가 와해되고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유물론적 사유, 정치적 사유를 시작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본문 262~263쪽)
우리에게 외부를 향해 열려 있자고 촉구하는 이 책은, 우리가 어떤 고정된 본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 사회?가족?국가?성별 등의 체계 속에 머물지 말고, 뜻밖의 만남을 긍정하며 그 내부에 변화를 적극적으로 가져오는 관계를 만들어 가자고 말하고 있다. 낯설고 불안한 외부와의 만남, 그 밖을 향해 전 존재를 열 때, 우리는 스스로가 욕망하는 나와 우리, 그리고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주침을 통한 멈춤 없는 변화, 그것이 우리의 정치학이고, 윤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