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년 에스파냐인이 도착했을 때 75만 명의 인디언이 파나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약탈·질병·살인 등으로 전체 인디언의 1/10이 죽었다.
스페인 식민지는 1510∼14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세워졌다.
1514년에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일명 페드라리아스)가 발보아를 물리쳤다. 1519년 페드라리아스는 파나마시티를 세우고 태평양 쪽으로 행정부를 옮겼다. 파나마는 스페인과 식민지 사이에 물건을 옮기는 수송 중심지로 발전했다.
1748년까지 뽀르또벨로에서 열렸던 무역박람회에서는 1688년까지 파나마 해안을 약탈했던 영국 해적선이 관심을 끌었다.
1751년 파나마는 콜롬비아 산딸페데보리따의 속령이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가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에콰도르·콜롬비아·파나마·베네수엘라)에서 스페인과 왕당파군을 격퇴한 후, 파나마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자발적으로 콜롬비아 동맹과 결합했다.
1830년대에 콜롬비아에서 이탈하려고 3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파나마는 번영을 누렸다. 많은 탐광자들이 대륙을 횡단하는 험한 미국 철도 대신에 캘리포니아로 가는 파나마 노정을 택했다.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건설된 파나마 철도가 1855년 개통되었으며, 곧바로 콜론 시가 세워졌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경영하는 프랑스계 회사가 1879년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이권을 정부로부터 얻어냈으나 1889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1850∼1900년에 40개의 행정부, 50번의 폭동, 5번의 분리 시도, 13번의 미국 간섭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초 운하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콜롬비아 상원이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연기했을 때 미국은 파나마 분리주의자의 운동을 지지했다. 그로 인해 1903년 11월 6일 파나마 폭동이 일어났으며, 11월 18일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 운하지대의 영구 소유권을 얻어냈으며, 완공된 운하는 1914년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파나마는 혼란에 빠졌다. 폭동이 자주 일어났으며 반미감정이 퍼져나갔다.
1968년 국민수비대가 오마르 또리호스 에레라 대령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그는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협상했다.
이 조약으로 파나마가 예전의 미국 운하지대에 대한 사법권을 맡게 되었으나, 운하 자체의 운용권은 1999년까지 미국에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파나마 정부에 넘어간 상태이다.
20세기말 경제침체와 심각한 정치변동은 1989년 12월 그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미군은 파나마를 침공하여 국방부 총사령관이자 파나마의 실권자인 마누엘 안또니오 노리에가 장군을 물러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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