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⑥융가스의 코카 재배와 흑인들의 정착
작성자 : 임두빈 | 작성일 : 2018-06-18 19:50:34 | 조회수 : 3,647 |
국가 : 볼리비아 | 언어 : 한국어 | 자료 : 문화 |
출처 : 뉴스토마토 | ||
발행일 : 2017.04.21 | ||
원문링크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747591 | ||
원문요약 : 필자 임채원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했다. 현재는 동대학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재직하며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는 필자가 2년간 볼리비아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항해시대 이래 지속된 세계화의 그늘에 관해 <뉴스토마토> 지면에 격주 금요일마다 총 11회로 연재한다. | ||
세계 이민의 역사에서 가장 슬픈 역사를 품고 있는 곳. 400년 동안 고향을 떠나있는 디아스포라의 애환과 고향의 흔적을 못 잊은 애잔함이 공존하는 곳. 볼리비아 융가스(Yungas)의 흑인 마을이다. 미주개발은행(The 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 IDB)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로 꼽은 '죽음의 길(Camino de la Muerte)'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La Paz)에서 융가스까지 가는 길이다. 깍아지른 낭떠러지 위에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폭으로 구불구불 펼쳐진 56㎞의 길 끝에는 400년이 넘은 흑인 정착촌이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오지에 인디오도 아닌 아프리카 흑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아프로볼리비아노(Afroboliviano)'으로 불린다. 해발 4000m에 있는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에서 해발 600~2500m의 구릉지대인 융가스로 내려가는 길. 급격하게 굽이치는 절벽 같은 산비탈을 사이에 두고 트럭이나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길이 가파르게 이어진다. 볼리비아는 라틴 아메리카의 내륙국가로, 가장 가난하고 생활 여건이 열악한 것으로 악명 높다. 그 볼리비아 오지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바로 이 융가스다. 옛부터 이 지역의 강가에는 사금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엘도라도를 찾듯 이곳에서 금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서양의 백인들은 이 지역의 험준함과 불순한 일기에 기겁했다. 투기꾼들이 금을 포기한 채 떠날 정도로 이 험준한 오지 중의 오지에는 이방인의 집단 이주촌이 40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에서 흑인들의 정착촌인 융가스 구릉지대로 가는 '죽음의 길(Camino de la Muerte)'.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 중에 하나로 꼽힌다. 오지탐험을 즐기는 모험가들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 중에 하나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포토시 은광개발과 함께 시작된 흑인들의 이민 융가스의 '아프로볼리비아노'들에게도 인간의 욕망과 탐욕 그리고 수탈의 흔적이 뒤엉켜 있다. 이들의 슬픈 이민사는 16세기 대항해시대의 정점에 있던 포토시(Potosi) 은광 개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에스파냐 식민당국은 1540년대 무렵부터 포토시의 은광을 대규모로 개발하면서 처음에는 안데스 인디오들을 동원했지만, 점차 더 강인한 체력과 근면함을 가진 노동자가 필요해졌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배로 실어와 광산 개발에 투입하는 게 유행이었다. 에스파냐 식민당국은 포토시 은광 개발에 이 방식을 활용키로 했다. 안데스 인디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흑인들까지 데려와 광산을 개발하면 수익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해발 4000m의 고지대가 뿜어내는 기후와 풍토에 흑인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안데스 인디오들은 고지대에서 지하 100m까지 갱도를 타고 내려가는 중노동을 견뎠지만, 초원에서만 살았던 흑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육체적으로 어느 인종보다 강인하지만 안데스에서는 맥없이 쓰러졌고 죽어 나갔다. 물론 인디오들도 열악한 광산 노동을 못 견뎌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흑인들은 고지대 자체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흑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광산 노동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거나 페루의 리마 등 해안지대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페루의 해안가에서 만날 수 있는 흑인들은 그 옛날 포토시 광산에서 도망친 흑인 노예들의 후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융가스의 흑인 정착촌(Coroico)에서 열린 축제 기간에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고립된 지역에서 안데스 인디오가 아니라 '아프로볼리비아(afroboliviano)'를 만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경이로움이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코카 재배를 위한 흑인들의 융가스 정부 에스파냐 식민당국은 기대와 달리 더 이상 흑인 노예를 이용한 광산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흑인 노예를 활용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이들을 코카 재배의 최적지로 꼽히는 융가스로 보내 코카를 키우고 채취하게 하는 것이었다. 법정 노동시간을 넘겨서까지 안데스 인디오들을 광산 노동에 투입하려면 향정신성 효과를 가진 코카잎을 공급하는 게 효과적이었는데, 흑인들이 바로 그 코카 재배를 맡았다. 효율적인 은광 개발 방식을 연구하는 데만 몰두한 에스파냐 식민당국 입장에서는 안데스 인디오와 흑인 노예들을 동시에 활용할 최적의 방법이었다. 흑인들은 융가스에서도 노예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코카 재배 덕분에 흑인들에게 자유가 왔다. 비록 라틴 아메리카의 오지 중의 오지로 고립됐지만, 대신 고지대에서의 극심한 육체노동에서는 해방됐다. 아열대 기후에 강우량이 많은 구릉지대는 아프리카 풍토와 비슷했고, 이곳에서 흑인들은 삶의 안정을 찾았다. 그 후예들이 지금까지 400년 넘게 정착촌을 형성, 악명 높은 코카인의 원료를 키우며 살아오고 있다. 아프리카 볼리비아인들은 융가스에서 400년 넘게 코카를 재배하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대항해 시대의 노예사냥과 노예무역 대항해시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노예사냥과 무역은 인류의 양심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이 당시 세계화는 양심이나 호혜를 통한 것이 아니라 폭력을 통한 것이었다. 그 폭력적 세계화에 가장 많이 희생된 사람들이 바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었다. 대항해시대는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났을 때 이방인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부정적인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문명이 조우했을 때, 서로간 절대적인 힘의 차이가 존재할 때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약자에게 잔혹할 수 있는지 역사는 말한다. 대항해시대 이후 성립된 세계 질서는 무력의 우위를 가진 서구 백인 문명과 상대적으로 열악한 아프리카 흑인들, 아메리카 인디오들 사이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대항해시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 폭력을 대서양 양안에 전파했다. 죄 없는 아프리카 흑인들은 하루아침에 자유인 신분에서 노예가 됐고,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인 인디오들은 유럽에서 온 이방인들의 무기와 행정조직, 그들이 전염시킨 병균에 몰살당했다. 400년 이상 지속된 흑인 노예무역의 슬픈 역사는 1441년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모리타니아 해안에서 흑인 10명을 잡아간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때부터 1000만명이 넘는 아프리카 흑인들은 노예가 되어 고향을 떠났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이라는 나라는 금광 개발이 없었다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대규모 금광 개발이 유행이었는데, 흑인 노예들은 대부분 광산 노동에 투입됐다. 광산 개발이 시들해지면 흑인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보내졌다. 사실 대항해시대가 아니어도 아프리카 안에서는 노예제와 노예무역이 존재했다고 한다. 다른 문명권에서는 재산 중 토지를 소유하는 게 우선이었지만, 아프리카는 사람 소유를 더 우선시했다. 16세기 이전에 이미 아프리카에서는 노예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며 내부적으로 배태됐던 요소들이 근대 이후 외부적인 요소와 결합, 대규모 노예무역으로 발전했다는 설명이다. 대항해시대의 노예무역은 부두교와 검보 수프, 바비큐 소스, 재즈 음악, 크레올 언어 등 아프리카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코카잎 건조 모습. 농장에서 수확된 코카잎은 마치 찻잎을 말리듯이 흑인 정착촌의 광장에서 건조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반건조된 코카잎은 볼리비아 각지의 구멍가게로 실려 나가 비닐봉지에 담긴 채 팔린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노예무역에 기반을 둔 금광 개발과 플랜테이션 농업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 남부 면화 재배 지역의 흑인 노예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흑인 노예보다 100년 정도 뒤의 일이다. 대서양 양안에서 있었던 대규모 흑인 노예사냥과 노예무역은 16세기에는 광산 개발, 17세기에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업이 중심이었다. 흑인 노예가 북아메리카 지역까지 전파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담배와 인디고, 쌀, 면화 재배가 북쪽까지 확대되면서부터다. 노예무역이 시작된 이래 1820년대까지 400여년간 아프리카 흑인 1000만명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고, 유럽인들은 240만명이 갔다. 1820년대가 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 인구는 1200만명으로 늘었지만 흑인 인구는 1100만명에 불과했다. 가혹한 노동과 풍토병에 시달린 결과다. 이주와 수탈의 슬픈 역사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항해시대의 폭력적 이민사는 인도와 중국의 '쿨리(Coolie)'로 이어졌고, 유럽의 하층민들까지 노예무역의 대상이 됐다. 대항해시대의 세계화를 폭력의 세계화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대상이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인종에 구분 없이 광범위하게 자행됐기 때문이다. 잉카제국의 종교 문화를 마약 산업으로 16~18세기 대항해시대의 이민사를 살펴보면, 가장 비극적인 것은 역시 볼리비아 흑인들의 융가스 정착이다. 융가스는 '죽음의 길' 탓에 외부에서의 접근도 쉽지 않다. 이들이 생업으로 삼은 코카는 원래 잉카문명에서 종교 행사 때 사제들이 영적 엑스터시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됐다. 그래서 당시 코카는 제한적으로 쓰였고, 사회적으로는 사용이 통제됐다. 하지만 에스파냐 식민당국은 광산 노동자들의 능률을 높이겠다며 인디오들에게 코카잎을 제공했고, 공급량을 맞추려고 대량으로 코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하필 코카는 우리나라의 차나무 재배지역처럼 강수량이 많고 습한 구릉지가 최적의 장소였는데, 흑인 노예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와 풍토가 비슷했다. 그래서 포토시에 있던 흑인 노예들은 융가스로 집단 이주하게 됐고, 숙명처럼 이곳에 400년간 코카를 재배하게 됐다. 융가스의 흑인 정착촌 모습. 아프리카에서 라틴 아메리카까지 온 흑인 노예들은 처음에는 포토시 광산 개발에 투입됐지만 고산지대의 중노동을 견뎌내지 못했다. 에스파냐 식민당국은 흑인들을 융가스로 강제 이주시켜 코카 재배에 투입하게 됐다. 융가스 흑인 정착촌에 오게 되면 '죽음의 길' 끝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에서 뜻하지 않은 고요와 평화를 만나게 된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흥미로운 점은 융가스에서 재배되는 코카는 그 유명세와 달리 코카인 원료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이곳의 코카잎은 볼리비아 사람들의 기호용으로 쓰인다. 코카인의 원료는 코차밤바(Cochabamba) 지역 차파레(Chapare)에서 나오고, 융가스의 코카잎은 볼리비아 각지의 구멍가게에서 일회용 비닐봉지에 담겨 코카잎은 마치 콜라를 사듯 누구나 살 수 있다. 융가스 코카잎은 운전수나 농장의 노동자 등이 단골이다.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10배나 되는 볼리비아에서는 대도시를 이동하는 데 보통 12시간 넘게 걸리고, 운전수들은 잠을 쫓으려고 코카잎을 씹는다. 볼리비아에서는 코카잎이 이처럼 일상적으로도 쓰이지만, 백인 주류사회에서는 코카잎을 씹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코카잎은 사회 하층민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라는 옛날 고정관념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죽음의 길' 끝에 있는 융가스에서 만나는 아프로볼리비아노들은 대항해시대의 죽음을 건너온 사람들임에도 삶은 평온하다. 축제 기간에는 미국 뉴올리언스의 흑인 재즈 못지않은 그들만의 독특한 흥과 멋이 있다. 대항해시대의 수탈과 억압을 건너, 그리고 '죽음의 길'을 건너 400년간 이곳 융가스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아프로볼리비아노를 보고 있으면 생명의 힘과 인간 존엄성에 대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의 길'로 오지 탐험에 나서는 한국의 청년들이 그 길의 끝에서 푸르른 생명과 삶을 간직한 아프로볼리비아노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갖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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