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서성철 | 작성일 : 2014-04-26 00:22:11 | 조회수 : 2,757 |
국가 : 아르헨티나 | 언어 : 한국어 | 자료 : 사회 |
서성철(중남미지역원 HK 연구교수)
아르헨티나에 간다고 하면 걱정이 늘 앞선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멀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이 나라에 한 예닐곱번 왔다 갔다 했나, 갈 때마다 이 장거리 여행을 어떻게 견딜까 미리 마음을 다진다. 파리를 들려서 가건, L.A.나 뉴욕을 들려서건, 최근 노선이 개설된 두바이를 통해서건 비행기 타는 시간만 족히 27시간 걸린다. 거기다 중간에 비행기 기다리고 갈아타는 시간까지 포함해 36시간도 걸린 적이 있었다. 2008년에 이 나라를 떠났다 다시 가는 셈이니 꼭 3년 반 만이다. 어차피 관광객으로 가는 것도 아니니 설렐 것도 없고 게다가 이 나라에서 한 3년 정도 살았으니 특별히 찍어서 가볼만한 곳도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에세이사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초입인, 세계에서 도로 폭이 가장 넓다는 '누에베 데 훌리오'(7월9일, 9 de Julio) 거리로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본 것은 전신국 건물에 걸려있는 에바 페론의 대형 실루엣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에바 페론의 대형 초상화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요 건물 곳곳에 걸려있었다. 에바 페론뿐이랴! 거리나 벽에는 에바 페론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이 서로 미모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 '민중속의 삶'(Vivir en el pueblo)라는 구호와 함께 두 사람이 함께 그려진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동안 레콜레타의 묘지에 조용히 누워서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에바 페론은 페론주의자인 크리스티나에 의해 다시 부활되어 도시 곳곳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상사 돌아가는 것은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라고, 택시만 타면 그들에게 요즈음 경기가 어떠냐 하고 물어보곤 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매번 듣는 것은 물가가 오르기는 했지만 수입은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대답이었다. 택시기사뿐이 아니라, 구멍가게 주인, 카페 웨이터, 포장마차에서 살치촌(Salchichon) 파는 사람 등, 서민들한테 경제 돌아가는 것을 물어보면 의외로 긍정적이어서 놀랬다. 아마도 크리스타니 정부 초기, 서민층을 위한 보조금(subsidio) 정책이 이들에게 물질적 혜택을 준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지금 그 보조금 정책은 폐지됐지만. 그러나 좀 있거나, 중산층 정도의 사람들한테 크리스티나에 대해 물어보면 한결같이 손을 내저으면서 정색을 하거나 악담 일색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말은 가난한 사람들한테 돈 뿌려서 지지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치하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사람이 값비싼 보석이나 명품옷으로 치장하고 그런 것에 관심을 쏟는 사람이 무슨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냐는 불만이었다.
사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성형을 많이 해서 얼굴이 망가져 화장을 짙게 하고, 유럽에 갈 때마다 백화점에 들려 비싼 쇼핑을 한다는 말들은 나도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명한 '카페 또르또니'(Cafe Tortoni) 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우연히 클라린(Clarin)지를 펼쳐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아르헨티나 공직자 중에서 크리스티나 대통령의 재산이 재임기간 중 제일 많이 불어났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크리스티나 행정부는 유대계 자본으로 구성된 아르헨티나 제 1의 언론재벌인 클라린지를 폐합시키는 중에 있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의 서민을 위한 경제 정책이 주효한 것인지, 아니면 포퓰리즘(populism)인지 아무튼 서민들한테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야 어떻든 페론 대통령 시절에는 선심성 퍼주기가 있었더라도 최소한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복지주의를 실천했었다. 그러나 현정부가 에너지, 교통 및 복지 등에서 취한 엄청난 보조금 정책은 엄청난 지지를 받았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이 나라를 파산 일보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경제는 꼭 경제통계나 정세보고를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다. 난 이곳에서 한 이 주간 머물면서 아, 여기 삶도 이전 같지 않네, 아주 강팍해졌구나 하는 걸 공항 도착하면서부터 피부로 느꼈었다. 주의사항 하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택시 탈 때, 특히 어두운 밤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거스름돈으로 위조지폐를 받을지 모른다. 그리고 공항에서 택시 탈 때는 공항 안에 있는 택시회사의 지정된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 공항 밖의 택시는 조금(아주 많이도 아니고) 쌀지는 모르나 영악한 친구들한테 당하는 수가 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어떤 택시라도 미터 요금으로 가진다. 먼저 기사와 가격흥정을 하고 맞으면 택시요금을 선불하는데 이 친구들이 100페소 지폐를 받고도 순식간에 감춰둔 10페소 지폐를 보여주면서 10페소 지폐를 잘못 주었으니 다시 달라는 속임수를 쓰기 때문이다. 자칭 중남미 좀 안다고 하는 내가 그들한테 두 번씩이나 영락없이 당했던 것이다.
2004년, 아르헨티나에 갔을 때, 택시기사들이 센타보까지 정확하게 계산한 거스름돈을 주고 게다가 영수증까지 주는 것을 보고 중남미를 아는 사람들한테 여긴 달라, 그래도 유럽애들 후손이라 자존심이 있어서 멕시코처럼 택시요금 가지고 장난은 안치거든 하면서 칭찬했던 것이 바로 7, 8년 전인데 이전 상황은 아니었다. 또 하나 놀랜 건 무엇보다도 물가였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건, 택시를 타건, 뭘 사건, 버릇처럼 이전의 값과 비교를 했던 것은 너무도 오른 물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디가나 쓰레기는 왜 그리도 많은지! 중남미에 살다 보면 쓰레기는 금세 익숙해지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전과 비교해 너무도 더러워지고 정도도 더 심해진 것처럼 느꼈다. 한 지하철역의 레일 위에 흥건히 고인 더러운 물, 그 위로 버려진 쓰레기들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전에도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못 본건가! 그리고 건물이건, 대문이건, 벽이건 여기저기에 그려진 이 보기 흉한 낙서들(graffitis)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늘어난 건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는 사람이면 꼭 가보게 되는 관광지인 산텔모 지역도 중심부를 조금만 벗어나면 여기저기 도로 블록도 깨져있고, 주위 건물들이나 집들도 오래 보수를 안해서인지 흉물스럽고 우범지대처럼 보인다. 을씨년스러운, 게다가 비오는 아르헨티나 겨울이라 더 그렇게 느꼈던 걸까? 아르헨티나 팜파스는 그 광대한 초원으로 인해 늘 감탄의 대상이었는데 버스창 너머로 보이는 휴지들, 플라스틱 봉지 등 갖가지 쓰레기들이 초록색 들판 위에 널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 아르헨티나는 국민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의 전반적 시스템이 안돌아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에베 데 훌리오' 남쪽의 서울로 치면 명동이라고나 할까 유명한 소비거리인 플로리다 거리가 있다. 고풍스런 건물에 옷가게, 갤러리, 레스토랑, 그리고 은은하면서 현란한 유럽풍의 조명, 반들거리는 하얀 포석, 그 위로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걷는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지만 거리 한가운데서는 대여섯명의 젊은 친구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달러 호객행위를 한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외환거래를 규제하자 다시 아르헨티나에서 암달러가 성행한 것이다. 공식환율로 1달러는 4.3페소지만 암달러상들은 6페소, 더는 6.5페소까지 바꿔준다. 그리고 외국 관광객을 위해서 늘 깨끗하게 청소하고 통제되었던 이곳에도 구걸하는 사람들, 노숙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보인다. 아르헨티나에서 버려진 쓰레기를 뒤져서 거기서 폐품을 찾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광경은 적어도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알베아르 지구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아르헨티나의 신용등급은 5단계나 강등되었고 높은 인플레이션 및 실업률, 수입억제정책으로 인한 수출의 감소, 국가재정의 바닥, 신용불량 사태까지 겹쳐 아르헨티나가 계속 이 지경으로 간다면 2000년대 초기에 일어난 디폴트 사태가 다시 닥칠지도 모른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이미 당시 유명했던 냄비 시위도 다시 재현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2011년부터 아르헨티나에서 말비나스(포클랜드)에 대한 영토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잠잠했던 이 문제에 대해 아르헨티나가 갑자기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에는 경제 실패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정부에 반대하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 이전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국내 불안을 국외로 돌리기 위한 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숨은 의도가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 한편 공간에 말비나스 전쟁 3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전시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 중에는 그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름을 죽 나열해 놓은 현판이 있다. 인권탄압과 경제실정을 호도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군사정부가 무모하게 일으킨 전쟁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병사들. 그들의 주검을 밟고 만들어진 애국심으로 표류하는 아르헨티나가 구해질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에바 페론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두 여성이 그려진 포스터가 오버랩 되어 온다. 아마도 이것은 크리스티나와 에바는 하나다라는 상징 조작을 통해서 페론 시대의 '벨 에포크'(Belle Epoque)를 상기시키려는 의도겠지만 사람이 추억만으로는 살 수 없고 유령이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 만약 에바 페론이 무덤에서 뛰쳐나와 지금의 아르헨티나 상황을 본다면 "크라이 훠 미, 알젠티나!"라고 울부짖지는 않을까?
*저자 주: 본 기사는 2012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 방문시의 현장 기록으로서 웹진 '라틴아메리카' No.20(2013.4월)에 실린 것을 재게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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