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라키스 | 작성일 : 2020-08-20 12:39:24 | 조회수 : 2,542 |
국가 : 중남미 | 언어 : 한국어 | 자료 : 사회 |
출처 : 다른백년 | ||
발행일 : 2020-08-16 | ||
원문링크 : http://thetomorrow.kr/archives/12620 | ||
소위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살인’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흑인에 대한 차별과 뿌리 깊은 인종주의의 민낯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실 모든 인종 이슈가 그러하듯 이번 사건의 본질은 ‘순수한’ 인종차별에 기인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백인 우월주의의 핵심은 피부색이 아니라, 백인 중심의 계급사회가 만들어낸 차별이기 때문이다. 조지 플로이드는 대부분 흑인 계층이 미국 사회에서 점하는 하층계급이다. 그로 인한 사회적 편견과 경멸은 미국의 ‘선량한’ 시민을 위협하며, 그는 마침내 미국의 ‘흑인’이 된다. 모든 흑인이 조지 플로이드와 같은 ‘살인’ 위험에 놓이지는 않는다. 미국 흑인 농구 스타 마이크 조던이 미국 경찰 손에 어이없이 살해당할 일은 시카고 슬럼가의 청년이 월스트리트에 입성하는 것만큼이나 낮은 확률일 테니까. 플로이드 죽음을 미국 계급사회의 차별이 부른 살인으로 보는 이유다. 미국 건국이 소수의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 북미 원주민들을 내쫓고, 이후에는 아프리카에서 ‘사냥’해온 흑인들을 노예제로 묶어 부국강병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흑역사 정도는 이미 세계 슈퍼파워로 등극한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 하층계급의 상당수가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들로 이루어진 이상 계급문제가 가려진 ‘인종주의’ 논쟁은 무한 반복될 공산이 크다. 미국의 계급사회에서 유색인종의 처지는, 라틴아메리카 토착 원주민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사회가 흑인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편견이 만연한 곳이라면 원주민을 향한 라틴아메리카의 백인 지배계급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지난 수 세기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그들이 백인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예를 들면, 마야 원주민이 국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미 과테말라 원주민들의 상황은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정복 이전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이들은 백인들에 의해 ‘미개한 인종’이 되었다. 유럽으로 이주한 소수 백인이 아메리카의 경제와 정치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였으며, 그렇게 그들만의 리그를 안정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 정착시켰다. “영원한 봄이라고 불리는 과테말라의 화사한 날씨와 푸른 자연환경은 신의 선물이라 해도 가히 손색이 없다. 과테말라 시티의 부촌은 정갈하게 가꾸어진 나무들과 거리,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사람들로 가득 차는 쇼핑몰의 깔끔한 외벽과 실내의 화려함은 눈이 부시다. 반면, 뉴스와 일간지에서는 매일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한 유아동의 사망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부촌의 저택에서 정원사와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젊은 원주민들의 새벽 발 빠른 출퇴근 모습은 흔하다. 아침마다 ‘주인’집 애완견을 산책시켜야 하는 메이드 복장의 원주민 소녀들의 모습은 흡사 식민지 시대의 봉건 사회를 연상케한다…(중략)”【1】 물론 과테말라의 이 계급 질서를 바꾸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역사상 유일했던 개혁 정부가 백인 지배계급 엘리트와 우파 군부의 쿠데타로 1954년 실각하자, 이후 약 36년에 걸친 내전을 치러야 했다. 1944년부터 약 10여 년 동안 계속된 개혁 정치는 기존의 과두 엘리트 지배계급과 원주민을 비롯한 다수의 피지배 계층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이어지며 결국 전쟁을 불러왔다. 내전은 명백한 계급전쟁이었고, 이 과정에서 약 2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의 대부분은 마야 원주민이었다. 군부에 의해 자행된 대대적인 ‘인종’ 학살은 궁극적으로는 당시 마야 원주민들의 정치 세력화를 두려워한 군부의 군사적 선택이었다. “마야 원주민을 섬멸한다”라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인종 제노사이드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이유다. 그러나 평화협상 과정에서 과테말라 내전의 원인이었던 계급 갈등은 ‘인종’ 갈등으로 치환되었고, 원주민들의 계급적 요구는 부정되었으며, 오롯이 ‘전통문화’ 회복 운동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내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마야인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이대로라면 더 나아질 가능성도 없다. 그리고 남은 것이 있다면 1992년 마야 원주민 여성 리고베르타 멘츄가 ‘최초’ 원주민 출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뿐이다. 마야인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고발하고 이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는 공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멘츄를 제외하고 내전으로 목숨을 잃은 20만 명에 이르는 마야인들은 멘츄의 ‘평화’상에 가려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요지부동한 과테말라 기득권 계층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며, 개혁을 요구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졌다. 이것이 20만 원주민의 희생 위로 멘츄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의 민낯이며, 계급적 요구를 인종 문제로 가려버린 결과였다. 36년 내전 중에 진행되었던 소위 ‘인종청소’는 엄밀히 말하자면 마야인 제거가 아니라,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기득권에 저항한 농민에 대한 학살이었다. 내전의 수많은 희생자에 대한 진실규명은 고사하고 원주민들은 아직도 국가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득권층으로부터 받는 배제와 차별, 그리고 이로 인해 확대 재생산되는 사회적 편견은 견고할 뿐이다. 게다가, ‘공생’이라는 이름으로 우파 정권과 연대하는 멘츄가 보여주는 정치권의 행보는 씁쓸할 뿐이다. 멘츄의 노벨평화상이 과테말라에 새로운 ‘평화’라도 가져올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미국에서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의 등장, 그리고 연이은 수많은 기대와 희망들이 좌절된 경험과도 유사하다. 미국 전체 선거 흑인 유권자 중 95%가 오바마에게 표를 주었고, 저소득 계층의 약 73%, 그리고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인 셈이다. 그러나 정작 흑인 대통령 오바마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월 스트리트의 꼭두각시였을 뿐 정작 그는 흑인 대통령으로 흑인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 없다,” 는 그를 향한 미국 흑인 사회의 비판은 뼈아프다. 이에 대해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흑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국민 모두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고 맞선다. 그 전체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의 이해관계도 포함되었으니, 개혁과 변화를 원했던 계층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백인 자본가들의 이해를 더욱 보장해 주었다. 미국 시스템은 견고하게 유지되었고, 계급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결국, 지금의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인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반동적’ 동력이 아니었을까. 기득권 계급의 특혜와 질서의 해체 없는 ‘개혁’은 개혁하지 않음과 다르지 않았다. 오바마가 월스트리트의 이해를 더욱 보장하고, 멘츄가 자신이 대변하는 원주민을 학살한 주체인 현 기득권과의 연대를 개혁의 방향으로 설정한 이상, 이들이 누리는 ‘최초’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는 개인의 ‘영광’일 뿐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조지 플로이드와 같은 계급적 살인은 계속되고, 과테말라 원주민의 빈곤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 구조적 차별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인종 논쟁이 아니라 계급의 재소환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피부색 ‘논쟁’에 가려버린 미국 사회의 계급 질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여전히 ‘열등한’ 국민으로 규정하고 개도하려 드는 인종주의자들의 보편적 지배 담론을 구성하는 주요 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종이 아니라 계급에 의해 차별받는다. 가난해서 차별받는 현실을 피부색 논쟁으로 가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중남미 사회 인류학자. 살라망카 주립대학에서 베네수엘라 주민자치조직인 주민평의회 연구로 사회인류학 박사 학위 받음. 주요 연구 분야 사회운동/계급투쟁/사회불평등/빈곤/사회구조 등이며, 베네수엘라/멕시코/과테말라/쿠바 지역 등을 주로 연구함. 현재는 쿠바 의과대학에서 학업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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