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라키스 | 작성일 : 2014-03-03 22:32:14 | 조회수 : 1,9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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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gence말띠 유명인② 에우제비우북한을 떨어뜨린 발롱도르의 영웅임두빈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2014.02.25 사실 필자가 브라질에서 1997년부터 시작한 유학생활 도중에 느낀 한국의 존재감은 왜소했다. 그러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브라질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나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모습을 현지에서 피부로 느낀 만큼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지구 반대쪽에 있는 브라질과 그쪽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지난 1월 13일에 포르투갈 출신으로 레알 마드리드FC에서 활약하고 있는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4년간 줄곧 아르헨티나의 메시가 치지해 온 발롱도르(Ballond’or, 영어로 ‘골든 볼’에 해당)를 스위스 취리히 FiFA 본부에서 수상했다. 발롱도르는 당대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이번 발롱도르 시상식에서는 지난해 12월 7일 브라질에서 개최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조추첨식 진행을 맡은 페르난다 리마가 시상식 진행을 맡아 세간의 관심을 다시 끌기도 했다. 이 상은 원래 1956년 프랑스 축구 전문지 ‘프랑스 풋볼’이 제정해 유럽에서 활동하는 유럽 출신 선수를 대상으로 전 세계 축구기자들의 투표를 통해 시상하던 상이었다. 사실 2010년 이전까지는 최고의 축구선수가 받을 수 있는 주요 상은 ‘발롱도르’와 1991년부터 국제축구연맹(FIFA)이 매년 전 세계 축구선수를 대상으로 시상하던 ‘FIFA 올해의 선수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펠레, 마라도나도 못 받은 발롱도르 그러나 발롱도르는 원래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는 유럽 출신 선수에 한해 시상해 왔기 때문에 1994년 미국월드컵 MVP로 뽑히면서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받고 프리메라리가에서 소속팀 FC바르셀로나의 승리를 견인한 호마리우(브라질)나 1980~199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축구신동 마라도나(아르헨티나)조차 이 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1995년부터는 발롱도르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수상 범위를 외국인 선수에게까지 확대했지만 여전히 비유럽 출신 선수에게는 논외의 상에 불과했다. 바로 유럽 무대에 진출하지 않고 산투스 FC 소속으로 브라질 리그에서 주로 활약한 축구황제 펠레는 이 상을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한 대표 선수로 꼽힌다.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결과 2010년에 이 두 개의 상이 통합된 이후에 아르헨티나 출신의 메시가 통합된 발롱도르의 영광스런 첫 수상자로 된 이후 2012년까지 91골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보여 주면서 3년 연속 발롱도르를 품에 안았다. 메시는 상이 통합되기 전인 2009년에도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는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 이 상을 수상했다. 이번에 수상한 호날두 역시 2008년에 유럽 출신 선수 자격으로 받았다. 호날두에 앞서 이 발롱도르를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축구선수는 루이스 피구(2000년)와 에우제비우(1965년)였다.
포르투갈 공격수로서 1960~1970년대에 펠레와 함께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꼽힌 에우제비우는 루이스 피구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앞선 세대의 포르투갈 축구 ‘원조’의 전설을 낳았다. 1942년생으로 말띠인 그는 청마해인 올해 1월 5일 7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세계무대에서 포르투갈 축구의 전설을 잇고 있는 호날두가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영웅인 그를 애도하고 포르투갈 정부가 사흘간 ‘국가 애도의 날’을 선포할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절대였다. 이른바 3F(파두, 풋볼, 파티마 성지)의 나라로 불리는 포르투갈은 1999년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역시 사흘간의 국장으로 애도한 바 있다. 1942년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이던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태어난 에우제비우는 1965년 15살의 어린 나이에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42경기에서 77골을 넣는 신기를 보여 준 그는 1960년부터 이후 15년 동안 포르투갈의 벤피카FC에서 활약하면서 무려 11차례나 정규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A매치는 64경기에 출장하여 41골을 기록하였고, 벤피카에서 614경기에 638골을 터뜨려 지금까지 벤피카 FC에서 개인 역대 최다골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미국리그를 거쳐 1979년 은퇴하기까지 통산 745경기에 출전해 733골을 터뜨리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다. 100m를 11초에 주파할 만큼 날쌔고, 개인기와 날카로운 오른발 슈팅을 무기로 한 돌파력 있는 축구를 구사한 그는 ‘흑표범’, ‘흑진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남긴 일화 가운데 슈팅한 공이 터진 사건은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포르투갈 출신은 에우제비우, 호날두만 상 받아 에우제비우는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전 세계 축구팬들이 기억하는 전설의 선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각별하다. 에우제비우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총 9골을 터뜨리며 포르투갈의 3위 달성을 이끌었다. 특히 이탈리아를 제치고 올라온 북한과 치른 8강전에서 3-0으로 지고 있던 경기를 후반전에 혼자서 4골을 쏟아내며 5-3의 역전승 드라마를 펼쳐 보여 준 모습은 포르투갈 국민들에겐 영웅의 모습, 남한과 북한 사람들 모두에게는 ‘도깨비’와도 같은 선수로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그의 이름이 ‘에우제비우’가 아닌 ‘유세비오’로 알려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포르투갈어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유세비오’로 둔갑된 것이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한국이었다. 체제 우월성의 다툼으로 국제무대에서 남북한 간의 경쟁이 치열하던 당시에 ‘체력은 국력’이라는 모토로 냉전시대에 대리전 양상의 성격을 띤 스포츠 내셔널리즘의 전성기가 구가되던 시대였기에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8강전에 올라간 북한의 선전은 남한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당시 한국은 지역예선 불참으로 FIFA로부터 징계를 받은 대회여서 그 충격은 더욱더 컸다. 북한의 예상외의 선전은 한국에 질시와 응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북한의 파죽지세를 꺾은 당사자가 바로 에우제비우였고, 이 경기를 지켜본 한국 축구팬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 선수를 기억 속에 각별하게 새기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주적 북한을 대신 무찔러 준 포르투갈 팀과 그 주역인 에우제비우의 인기는 남한에서 축구황제 ‘펠레’의 인기를 넘어서기도 했다. 당시 브라질은 펠레의 부상으로 한국인의 추억 속에 남다른 존재로 각인된 에우제비우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텔레비전 해설자로 방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못한 이유에서 살펴봤듯이 펠레는 주로 브라질 국내 리그에서 활동했고 에우제비우는 유럽에서 활동하느라 실제로 맞대결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항간에서는 두 선수가 펼치는 가상의 대결이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흔히 마라도나를 펠레와 비교하는 최고의 더비로 떠올리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선수 경력이 겹치는 시기는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친구가 된 에우제비우와 펠레는 포르투갈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의 선수라는 공통점과 흑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펠레는 195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여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역대 최연소 득점자로 이름을 올리면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전에 볼 수 없던 독창성이 있으면서 화려한 드리블과 개인기를 앞세워 문전 앞에서 수비수를 농락하고, 브라질 산투스 유니폼을 입고 리그에서만 638경기에 출전해 무려 619골을 터뜨리는 등 최고의 골잡이로 명성을 높였다. 그 능력은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웠고, 브라질 현대축구의 나침판이 되었다. 에우제비우가 펠레와 쌍벽을 이루는 실력을 갖춘 선수였지만 다른 선수와 비교해 덜 알려진 이유 가운데 포르투갈이 역대 월드컵에서 우승국이 된 적이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펠레와 에우제비우 대결은 3대3 무승부 훗날 두 사람은 1968년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성사된, 펠레가 있는 산투스FC와 에우제비우의 벤피카FC의 더비 경기에서 세기의 맞대결을 벌였지만 3-3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두 사람은 미국 리그에 진출하여 1975년에 맞대결을 다시 벌이게 되었는데 에우제비우가 속한 보스턴 FC가 펠레가 속한 뉴욕 FC를 2-1로 이겼다. 세계가 인정하는 두 사람의 축구영웅이 모두 포르투갈과 연결된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한 21세기 축구세계에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있다면 1960년대에는 에우제비우와 펠레가 있었다는 비유도 적절할 것 같다. 두 경우 모두 유럽과 남미의 대결 구도이다 보니 결국 ‘축구공’은 유럽과 남미의 발끝에서 논다는 부러움과 씁쓸함이 동반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역시 축구강국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고 해도 축구는 근대에 발전한 스포츠이기 때문에 굳이 포르투갈이 브라질 축구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포르투갈에 축구가 들어온 곳은 포르투갈에서 떨어져 있는 대서양의 마데이라(Madeira)라는 섬이었다. 윈스턴 처칠이 생전에 즐겨 찾고 축구 신동 호날두의 고향이어서 더 유명해진 마데이라 섬의 카마샤에 1875년에 설치한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축구 시합이 열린 곳’이라고 새긴 기념비석을 만나볼 수 있다. 브라질이 축구와 관계를 맺게 된 역사는 1894년에 찰스 밀러라는 영국계 브라질 청년이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축구공 2개와 유니폼을 들고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양쪽 간에 교류는 있었겠지만 두 개의 세계는 축구에 대한 별개의 역사를 써 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오히려 이 두 축구 세계의 생명력에 깃든 공통점은 에우제비우와 펠레에서 볼 수 있듯 아프리카에 있다. 아프리카인 특유의 탄력성과 유연성에는 백인 선수들이 흉내 내기 힘든 어떤 것이 있다. 흔히 브라질 축구를 삼바 축구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징가’(Ginga)의 축구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이 ‘징가’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전래의 고유무술을 계승 발전시킨 ‘카포에이라(capoeira)’의 기본 동작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네 택견과 비슷한 ‘허허실실’의 동작을 선보인다. 삼바 축구라는 미명 아래 배제되었지만 에우제비우 역시 이 ‘징가’의 세례를 받았음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축구의 종가는 잉글랜드라고 하지만 포르투갈 축구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항상 한 시대를 풍미하는 스트라이커를 배출하고 다시 그 대를 잇는 또 다른 스트라이커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한국도 축구에 열광하는 편이지만 사실 그 역사와 문화는 유럽과 중남미에 비교해서 미미하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 국가대표팀 경기 같은 스포츠 내셔널리즘에는 열광하면서도 정작 프로축구에는 관심이 없는 게 우리 축구문화의 현 주소인 것 같다. 한 나라의 축구 발전은 팬들의 존재와 지지가 필수자양분이다. 이런 자양분을 바탕으로 비로소 한 나라의 축구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 자본을 지닐 수 있게 된다. ‘국가’가 집단의 가장 기본단위가 되는 월드컵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자국의 대표팀에 오버랩시킨다. 사실상 우리가 축구를 하나의 스포츠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축구를 매개로 한 민족 집단 간의 경쟁과 그 승패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이런 우리와 달리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축구는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다. 그렇기에 축구는 대외로 그동안 훌륭한 외교관 역할을 수행해 왔고 자신과 그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점차 경색되어 가는 한·일 관계에서도 ‘축구’와 같은 어떤 공통의 돌파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 기사는 머니투데이 TECH&beyond 제10호(2014년2월)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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