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라키스 작성일 : 2014-01-23 13:29:14 조회수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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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두빈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  2014.01.06
 
각각의 사회에는 그 구성원들이 선호하고 맛의 전통을 지키려는 구조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한 지역의 특정한 맛이 다른 장소에 전해지고 거기서 그 맛을 인정받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그 맛을 대량으로 보급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은 욕구를 만들어 정착시키는 과정도 필요하다. 인간의 생존 차원에 가장 필요한 필수 요소를 ‘공기’ 외에 ‘물’을 꼽는다면 잉여 성격이면서도 인간의 욕구를 담은 마실 거리로 차, 커피, 술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소설가 김훈은 ‘찻잔 속의 낙원’에서 ‘차’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로 표현했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시간을 ‘티타임(tea time)’,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로 달리 표현하듯 각각의 마실 거리는 그만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다.


미국이 커피 최대 소비국이라면 영국을 대표하는 음료는 차다. 오후의 티타임하면 바로 연상되는 나라도 영국이고, 전 세계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찻잔도 영국 메이커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국의 식민지이던 미국이 지금은 차가 아닌 커피의 최대 소비국이란 사실이다. 이런 사실의 이면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73년 12월 16일에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으로 미국이 차 대신 커피를 마시게 된 역사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미국 사람들의 커피 사랑은 미국 독립 과정과 밀접한 상징성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마실 거리의 간략한 역사를 보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823년 통일신라시대에 김부겸이 중국에서 차 종자를 처음 가져오면서 불교가 융성하던 고려시대에 차 전성시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먹을거리도 부족하던 배고픈 시절에 만들기도 까다로운 차를 공물로 바치는 과정이 백성들의 고통을 수반한 만큼 차는 일반 백성들에게 인간 생존에 필수가 아닌 사치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차 소비에 절대 구매력을 행사하던 고려시대 승려들이 몰락하고 검약을 추구하는 유교의 영향으로 차 문화 쇠퇴가 일어났다. 그 이후 차 문화를 대체할 만한 민족 차원의 마실 거리가 ‘풍류’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던 조선시대 선비나 사대부를 통해 ‘술’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료에 따르면 문화가 융성하던 고려시대가 양조기술의 정착기이자 전통주들이 막 개발되는 시기였다면 조선시대는 술의 다양화와 고급화가 일어난 시기로서 지방 토속주들이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차 문화의 쇠퇴와 함께 우리나라의 술은 일제강점기에 주세령 강제 집행으로 다양하던 전통주들이 말살되면서 단순화, 규격화를 이루게 된다. 광복 이후에는 식량난 해소를 위한 ‘양곡법’ 시행으로 쌀을 술의 원료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미국인들이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비싼 차 대신 커피를 마시게 된 것처럼 전통 소주가 아닌 희석식 소주가 대중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하여 대중화된 소주는 이번 12월 12일 해외 주류 전문 잡지 드링크인터내셔널(Drinks International)을 인용한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증류주 톱10에서 1위와 4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제화의 위상이 올라갔다(1년에 6000만 상자 이상).

영국인의 욕구가 빚어낸 포트와인 탄생
그렇다면 이제 서양의 마실 거리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동양에서의 ‘차’가 ‘실존의 국물’이라고 부른다면 와인은 ‘신의 눈물’, ‘인간의 영혼을 꿈꾸게 한다’, ‘혀끝으로 오르가슴을 느낀다’ 등의 화려한 수사가 어울린다. 그리고 문외한이라도 대개 와인 하면 프랑스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영국과 차는 어울려도 포도주와는 왠지 이렇다 할 인연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 저편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지속된 백년전쟁으로까지 치닫는다.


프랑스 영토 안이지만 영국의 손아귀에 있던 유럽 최대의 모직물공업 지대와 최대 포도주 생산지의 탈환이 이 전쟁의 핵심이었고, 프랑스에 의해 보르도가 함락되면서 영국은 자국의 와인 공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더군다나 프랑스 와인에 매겨진 높은 세금 때문에 영국의 와인 업자들은 새로운 공급처를 런던에서 뱃길이 가장 가깝고 오랜 우호 관계에 있는 포르투갈에서 찾아 헤맸다. 바로 여기서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그러나 다른 와인과 성격을 달리하는 ‘포트’(포르투갈 현지에서는 ‘포르투’라고 발음한다)와인이 탄생하게 된다. 당시 영국 상인들이 찾던 와인은 먼 뱃길에서도 상하지 않을 만큼 구조가 강한 와인이었다. 이런 노력 끝에 찾아낸 포도주 산지가 바로 도루(Douro) 포도밭이었다.

놀랍게도 도루 포도밭에 대한 법령 분류는 1855년 보르도의 법령 체계보다 1세기 앞선 1757년에 이루어졌다. 법으로 규정된 세계에서 최초의 와인 생산지인 셈이다. 도루 포도밭은 좁은 비탈길에 천수답처럼 계단식으로 분포되어 있고, 모두 수작업으로 재배되고 수확된다. 현재 도루밸리 포도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루밸리의 토양은 척박한 편이어서 토양 속 미네랄은 풍부한 반면에 수확된 포도의 즙이 무척 적지만 매우 농축되어 있어 충만한 맛과 향을 제공한다고 한다. 그리고 포트와인은 약 30가지 이상의 품종이 사용되는데 칵테일을 만들 듯 각각의 개성을 지닌 품종들을 블렌딩해서 만들어 낸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이 현대화되었지만 주정을 강화하기 전에 전통 있는 포트와인은 포도와 씨에 함유된 성분의 파괴를 막기 위해 화강암으로 만든 통에 여러 명이 들어가 발로 포도를 으깨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포트와인은 바로 이곳에서 거의 2000년 동안 생산되어 왔다. 영국 상인들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브랜디를 첨가해 와인의 구조를 강화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도루 강 하구에 있는 포르투(Porto) 항구에서 선적하기 전에 와인 통마다 브랜디를 첨가해 발효가 중지되고 포도의 자연당을 잔류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정강화 와인으로 분류되는 포르투갈의 명주인 포트와인이 탄생했다. 명칭이 생산지인 ‘도루’를 따르지 않고 ‘포트’와인으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주정을 강화하고 선적한 포르투 항구의 지명을 영어식 발음으로 굳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포트와인은 오크통에서 숙성이 되지만 빈티지 포트는 병에서 오랜 기간 숙성된다.

이 빈티지 포트는 프랑스의 프리미엄 와인처럼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인에 의해 개발된 포트와인의 최대 수입국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다. 그러나 프리미엄급 포트와인의 주요 시장은 영국과 북미 지역이며, 우리나라에도 서서히 소개되고 있다. 이렇듯 포트와인은 영국인을 구한 와인이나 다를 바 없다. 영국 상인에 의해 개발되고 1703년 포르투갈과 영국 간 메수엔(Methuen)조약이 체결돼 양모와 와인의 관세가 낮아지면서 영국은 포트와인의 최대 시장이 되었다.

사실 1386년 양국 간에 맺어진 윈저조약을 시작으로 양모와 와인의 교환만큼이나 영국과 포르투갈 간의 우호 관계 역사는 돈독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도 영국을 편들던 포르투갈이 19세기 초에 식민지 브라질로 왕실 전체를 천도하게 된 이유도 그렇고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중립을 지키던 포르투갈이 영국으로 인해 참가하게 되는 관계도 그렇다.


또 다른 주정 강화 와인 마데이라(Madeira)
포르투갈에는 포트와인 외에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와인이 있는데 바로 마데이라(Madeira)다. 마데이라는 포르투갈어로 ‘나무’라는 의미인데 포르투갈 내륙에서 1000㎞나 깊숙이 들어간 화산섬이기도 하다. 마데이라는 무인도였다가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명령으로 대항해시대 기항지로 개척되었다. ‘마데이라’ 섬은 이름만큼이나 섬 전체에 나무가 아주 많아서 모두 불태우고 화전으로 개간되었다. 이러한 화전 방식은 오늘날 브라질에서도 아직까지 접할 수 있다. 그렇게 개간된 마데이라 섬은 사탕수수와 포도 재배로 당시 포르투갈 왕실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수행했다.


마데이라와인은 원래 화이트 와인이었으나 ‘포트와인’처럼 바다로 운송하다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섬의 특산물인 사탕수수로 만든 주정을 넣어 와인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강화된 와인이 배 갑판에서 오랜 시간을 햇빛과 공기에 노출되어도 상하지 않고 비와 같은 외부 요인과 뒤섞임으로써 독특한 성격의 와인으로 진화한 것이다.

포트와인과 마데이라와인에는 영국과 포르투갈의 돈독한 관계가 담겨 있다. 영국이 바다를 주름잡던 17세기에는 당시 영국 국왕 찰스2세의 허락이 있어야 대서양을 다닐 수 있었는데 1662년 포르투갈 왕녀 카타리나 데 브라간사(Catarina de Braganca)가 찰스 2세에게 많은 현금뿐만 아니라 마카오를 제외한 모든 포르투갈령 항구에서의 자유 무역을 허가하고 인도의 봄베이(현재 뭄바이)와 모로코의 탕헤르를 결혼 지참금을 바치면서 시집을 오게 됐다.

이는 세계사에서 가장 막대한 지참금이 바쳐진 결혼식으로 기록되었다. 지참금에 흡족한 찰스2세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를 해상법에서 풀어 주고 마데이라와인의 자유로운 수출을 허가해 줬다. 당시 영국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영국 식민지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의 교역을 전부 제한했기 때문에 이는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킨 미국인들의 부러움을 샀고, 그들은 마데이라와인을 마시면서 자신들도 마데이라처럼 영국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실제로 미국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직후에 토머스 제퍼슨 등이 자축할 때 사용된 마데이라와인이 미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포도주가 되었다. 비록 영국 왕위 계승자를 남기진 못했지만 카타리나 왕비는 영국의 관습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대항해시대에 바닷길을 연 포르투갈 궁정은 동방무역을 통한 극동지역 궁정들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세련된 궁정의 하나였다. 1662년 카타리나 왕비가 영국에 도착한 당시만 해도 차는 매우 귀한 음료였다. 목이 마른 카타리나 왕녀가 포르투갈에서처럼 예사로 차를 부탁했지만 대신에 에일 맥주를 제공받았다고 할 정도였다.

 

포르투갈 출신의 이 왕비가 ‘5시의 차(Five O’clock Tea)’를 영국 궁정에 소개하였으며, 포트와인 및 마데이라와인과 함께 정식 연회에서 포크의 사용을 처음으로 도입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아주 좋아한 중국 원산지의 ‘만다린’ 오렌지 역시 영국으로 들여왔다. 지금은 이 ‘만다린’오렌지를 탠저린(탕헤르)오렌지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카타리나 왕비의 만다린 농장이 탕헤르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훗날 찰스 2세가 임종 후 왕비는 고향인 포르투갈로 돌아갔고, 1703년 영국과의 메수엔 통상조약을 지지하고 포트와인을 영국의 모직물과 교환하여 영국으로 수출하게끔 만들었다. 오늘날 뉴욕의 독립구 가운데 ‘퀸스’가 바로 카타리나 ‘왕비’를 따서 지은 이름이기도 하다.

 

이렇듯 한 지역의 특정한 맛이 다른 장소에 전해져서 거기서 그 맛을 인정받고 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은 욕구를 새롭게 만들어 정착시킨 과정에는 숨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맛을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아직 와인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은 우리나라는 의외로 달고 도수 강한 포트와인의 맛에 호불호가 나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와인에 익숙한 사람에게 주정이 강화된 와인은 선호도가 떨어질 수 있고, 집에서 담근 달작지근한 포도주에 익숙한 사람은 의외로 친숙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개봉 후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구조로 되어 있는 포트와인은 식전 식욕을 돋우는 용도나 식후 디저트용 와인으로 알고 받아들인다면 더욱 친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아는 만큼 그 맛도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brasil@korea.com
 
<본 기사는 머니투데이 TECH&beyond 제9호(2013년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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