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월드컵 대륙, 남미-남미축구]<2>아르헨티나 ‘수페르클라시코’
아르헨티나 축구는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의 맞대결인 ‘수페르클라시코’로 대변된다.
이탈리아 이민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보카 주니어스와 중산층의 지지를 받는 리버 플레이트는 계급 간의 대결 양상을 보여왔다.
사진은 리버 플레이트 팬들이 보카 주니어스와의 라이벌전에서 열광하고 있는 모습. AP 뉴시스
구경모 부산외국어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축구에서 라이벌전, 더비는 단순히 맞수 간의 대결을 뜻하는 게 아니다. 더비는 각 구단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취향과 계급, 종교, 지역 혹은 국가의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더비는 해당 지역민의 삶과 역사를 반영한다.
세계 3대 더비는 스페인의 엘 클라시코(El cl´asico)와 스코틀랜드의 올드펌(Old Firm), 아르헨티나의 수페르클라시코(Supercl´asico)를 일컫는다. 수페르클라시코는 남미 축구의 자존심으로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의 경기를 말한다. 보카 주니어스는 가난한 이탈리아계 이주노동자들이 주축이었고 리버 플레이트는 중산층 이상의 지원을 받아 처음부터 계급 대결의 양상을 띠었다. 서로를 경멸하는 노래를 부르며 열광하는 양 팀의 응원전은 세계 3대 더비 중 단연 최고라 할 만하다. 영국의 신문인 옵서버는 수페르클라시코를 “세상에서 죽기 전에 봐야 할 빼어난 50가지 스포츠 경기”로 선정했다. 또 이 신문은 “두 구단의 경기가 있는 날은 올드펌 더비가 초등학교 공놀이 수준으로 보인다”고 비유했다.
일본의 장편 만화영화인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주인공인 마르코는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작정 떠난다. 여기서 삼만리는 마르코가 살고 있던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간의 거리를 말한다.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간 시절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 출신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가난을 벗어나 희망을 찾고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시기이다. 당시 극심한 가난에 견디지 못한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 줄기 희망을 찾아 남미로 향했다. 이 무렵 아르헨티나는 세계 5대 부국으로서 경제적 침체기에 있던 유럽인들이 선망하던 꿈의 나라였다.
보카 주니어스는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보카 주니어스의 명칭은 지명인 라 보카(La Boca)에서 유래됐다. ‘강어귀’ 또는 ‘입구’라는 뜻에서 보듯이 이 지역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가로지르는 라 플라타 강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문이자 항구이다. 이 항구에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망망대해를 건너 이민자들이 모여들었다. 보카 항 입구의 이주노동자들의 고된 모습과 탱고를 그린 벽화는 그 당시 이민자들의 애환을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설움을 잊기 위해 탱고를 즐겼고 자연스레 보카 지구는 탱고의 발상지가 되었다. 탱고와 축구는 가난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의 고된 일상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다.
보카에서 같이 태어나 1938년 부촌인 벨그라노로 옮긴 리버 플레이트는 보카 주니어스 팬에게는 배신의 아이콘이다. 보카 주니어스가 ‘가진 자들의 구단’ 리버 플레이트와 경기할 때 더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르헨티나 축구팬 70% 이상이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를 응원한다고 하니 말 다했다. 보카 주니어스는 아르헨티나의 축구영웅 마라도나가 뛴 곳으로도 유명하다.
2011년 6월 3일 리오넬 메시가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식당에서 한 남성에게 폭행을 당해 화제를 모았다.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고 금의환향한 메시를 고향 팬이 폭행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메시는 그의 고향 연고지 뉴 웰스 올드보이스에서 선수로 생활했다. 이에 로사리오 센트럴(Rosario Central)의 열성 팬이 메시에게 감정을 표출한 것이다. 두 구단의 맞대결은 클라시코 로사리오(Cl´asico Rosario)로 불리며 수페르클라시코에 이어 아르헨티나를 대표한다. 두 구단은 모두 영국인들이 창단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계급적으로 대립 관계에 놓여 있는 점은 수페르클라시코와 유사하다. 뉴 웰스 올드보이스는 1903년 영국계 이민자들로 상층부가 주축이 돼 만들어졌고 로사리오 센트럴은 철도회사에 소속된 영국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졌다. 혁명가 체 게바라가 로사리오 센트럴의 팬이었다. 체 게바라는 로사리오에서 태어났지만 한 번도 로사리오 센트럴 구장인 히간테 아로이토를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로사리오 센트럴의 골수팬임을 공공연히 드러냈다고 한다. 먼 타국에서 혁명할 때도 체 게바라는 고향의 클럽 소식에 귀를 쫑긋 세웠다고 한다. 메시를 폭행한 팬의 로사리오 센트럴에 대한 격렬한 사랑은 아마도 체 게바라의 뜨거운 혁명의 열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애착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구경모 부산외국어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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