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⑤ 브라질 언어 전쟁: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 (임두빈HK교수)
작성자 : 임두빈 | 작성일 : 2020-05-08 16:21:29 | 조회수 : 1,832 |
관련링크 : http://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40 | ||
원문요약 : 연재를 시작하며 대학지성 이번 호(2020.01.05)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IIAS) HK+사업단의 <라틴아메리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월 1회 연재한다.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은 2008년부터 2018년 8월 31일까지 10년간 라틴아메리카의 세계화를 분석하는 인문한국(HK)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후 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에 다시 선정되어 2018년 9월1일을 시작으로 향후 7년간 연구 아젠다 “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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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언어 전쟁: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
“라틴아메리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의도치 않게 이 질문을 통해 ‘대상’을 단일화시키고 그가 가진 복수성을 단순화시킨다. 중남미지역 연구자로서 우리 사회로부터 관련 지식을 요청받을 때마다 ‘라틴아메리카는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브라질은 요즘 저렇습니다’ 라고 얘기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거나 간접적인 지식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 그렇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라틴아메리카란 대상에 가지고 있는 표상과 우리가 갖고 있는 확신이나 믿음 간에 생기는 격차가 사실상 크기 때문이다. 영국의 언어철학자 오스틴(J. Austin)이 제안했듯이 언어는 행위의 한 가지 양태다. ‘라틴아메리카’란 말도 쓰기를 통해 텍스트가 되면서 저자나 독자에 의해 기록되고 해석되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유럽인에 의해 탄생한 ‘그 라틴아메리카’도 저자와 독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쳤다. 과거의 유럽인이 그랬듯이 한국인인 우리가 ‘브라질’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얘기할 수 있지만, 사실상 그 지식에 대한 확신은 자신이 속한 담론구성체 안에 바탕을 둔 편향성에 기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브라질에 대한 지식과 시각은 ‘객관적’이지 않고 편견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편견이나 아집이 ‘전문가가 한 말’이란 미명 아래 사회 안에서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 위험성도 존재한다. 인문사회과학연구가 자연과학처럼 세심하게 통제된 실험실 실험을 할 수 없는 연성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유형의 위험을 해소하기 위해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얘기했듯이 ‘건설적 편집증’(Constructive paranoia)이 필요하다. ‘브라질의 이해’에 대한 확신과 신념에 대해 그것이 생겨나게 된 근원과 과정까지 탐구하는 것도 해외지역연구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전체 2억이 조금 넘는 사용인구를 가진 포르투갈어는 전 세계적으로 여섯 번째로 사용인구가 많고 인터넷상에서 네 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이다. 15세기부터 “땅이 존재하면 그것에 이르리라”라는 기치 아래 이루어진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통해 현재 포르투갈어는 유럽의 포르투갈, 남미의 브라질,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까보베르드, 기네비싸우, 상또메 이 뿌린시삐, 동남아시아의 동티모르에서 공식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외 과거 포르투갈의 해상제국이 지배했던 인도의 고아, 중국의 마카오 등에서 그 흔적을 아직까지 찾아볼 수 있다. 2016년에 개봉한 지구인과 외계인과의 대화를 소재로 한 영화 ‘컨택트’에서 “언어는 모든 문명의 초석이지만 모든 싸움의 첫 번째 무기”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포르투갈인의 브라질 정복도 언어전쟁을 필두로 진행됐듯이 언어는 인간들 사이 의사소통 외에도 인간의 삶과 현실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언어를 통해 전승되고 구성원들을 사회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언어를 단순히 사회적 투쟁의 장밖에 존재하는 중립적인 도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 안에서 거치는 언어적 과정, 즉 담론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의미효과와 주체효과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브라질 발견 초기에 포르투갈 지식인들은 “브라질 해안가에 거주하는 인디오들의 말에 F, L, R 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는 것으로 봐서 그들은 신앙(Fé)도, 법(Lei)도, 왕(Rei)도 없는 무질서한 세상에 살고 있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이런 관점은 당시 르네상스시대에 대부분의 유럽 학자들이 가졌던 사고와 언어를 동일시했던 시각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언어를 민족과 단순히 연결시키는 차원을 뛰어 넘어 유럽민족이 강한 이유를 그들이 사용하는 민족어의 우수성과 연관 짓고 원주민 언어와 같은 약소 집단의 언어를 그 구성원과 함께 소멸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제국주의적 언어관은 개별언어와 민족사이의 절대적 필연성을 강조한 낭만주의적 언어관을 배타적으로 계승하면서 중세사회의 봉건적 질서에서 합리주의 세계로 가는 과도기 과정에서 발현됐다. 식민지시대 포르투갈의 강압적인 언어정책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포르투갈어는 유럽과 생태적, 사회적으로 다른 환경을 거쳐 유럽 포르투갈어와 모습을 달리해 갔다. 그러나 언어체계상 동일성은 유지되면서 통합성은 지켜졌다. 하지만 정치적 독립을 이룬 후에 브라질에서 민족주의 발현과 함께 유럽 포르투갈어와 구분되는 ‘브라질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유럽 포르투갈어에 대한 반동일시 형태로 1920년대에는 모더니즘 운동으로 포르투갈식 성을 버리고 원주민어로 바꾸는 사회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여러 지역과 계층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성 존중 차원이 아니라 포르투갈의 간섭이 없는 독자적인 권력을 원했던 브라질의 소수 백인 엘리트 계층에 의한 사회지배 담론의 일환이었다. 브라질에 이식된 포르투갈어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식되어 태생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띠는 한계를 가졌다. 현재 포르투갈어가 브라질 전역을 통틀어 200개 정도 존재하는 소수 언어에 대해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갖는 언어란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브라질 사람만큼 포르투갈어를 못하는 사람은 없다.” “브라질 사람은 항상 포르투갈어를 틀리게 말한다.” “포르투갈어는 너무 어렵다.” 이처럼 브라질 사람들은 자신의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외국어를 대하는 듯이 본인의 모국어 사용 능력에 자괴감을 가지고 자기비하적인 발언을 자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국어 사용 능력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할까? 그 원인의 기저에는 과거 침입자와의 전쟁에서 현재 내전 양상으로 그 축이 바뀌었을 뿐 식민 시대부터 시작된 ‘언어전쟁’이 아직도 진행형이란 데 있다. 사회적·정치적·경제적인 토대 역시 식민지 시대와 달라진 점이 크게 없다. 고등교육을 받고 부를 독식한 소수 백인 엘리트 계층은 역사적으로 불공정한 부의 분배에서 배제된 문맹자나 저소득 계층을 언어사용 측면에서 차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하는 방식 또한 규범어를 기준으로 그들로부터 차이를 둔다. 표준 규범 포르투갈어의 존속과 유지는 당시 브라질의 엘리트 계층의 혼혈인과 아프리카인을 배제한 백인 민족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럽의 건설이라는 정치적 지향점과 맥을 같이 했다. 이러한 언어차별주의는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란 단어가 특정한 담론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담론과정은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알튀세르학파 언어학자인 페쇠가 주장했듯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담론과정을 결정하는 권력을 가진 대주체는 ‘두꺼운 언어’를, 망각을 통해 무의식처럼 대주체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소주체는 ‘얇은 언어’를 가진다. 소주체인 대다수의 브라질 언중들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외부가 자신이 속한 담론구성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에 모국어 사용에 대한 열등감을 개인적으로 지니게 된다. 이렇게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는 역사과정에서 배제되어 온 대다수 민중의 배제는 소수 엘리트 계층과 다수 민중 사이에 깊은 골을 파놓았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소수 엘리트 계층에 의해 수호되어 온 포르투갈 규범문법은 정작 대다수의 브라질 국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방식이나 표현방식을 ‘틀린 말’, ‘교양이 없는 말’로 규정지으면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국어 사용자로서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다. 결국 브라질 사람들은 A처럼 말하지만 B처럼 써야 하는 ‘언어분열증’ 현상을 가지게 됐다. 브라질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사회문제 중의 하나인 교육문제도 이 ‘언어분열증’과 연관이 있다. 소수 엘리트 중심의 권위주의적 사회를 거쳐 오면서 국민에 대한 기본 교육 제공 실적은 저조했지만 교육에 요구되는 언어규범은 ‘말’이 아닌 고전에 바탕을 둔 ‘글’이었다. 브라질 공교육은 아직 국토 전역으로 균일하게 제공되지 않으며, 15세 이상에 해당되는 상당수의 인구가 기능적 문맹 상태에 있다고 한다. 그 외, 재학생 중 40% 미만이 정상적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는 형편에 있다. 브라질은 아직 문자 보급의 역사가 짧은 나라이고, 교육이 시민의 권리나 정부의 의무이지만 허울만 있고 특권층이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한 방편인 성격이 크다. 그러므로 브라질의 언어문화 자체가 규범에 묶이는 ‘문자’보다는 ‘말’을 선호하는 환경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시대에도 우리는 문자를 선호하는 반면, 브라질 사람들은 녹음된 음성 메시지 교환을 선호한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공공교육의 양적 팽창이 일어났다. 교육의 민주화를 위해 도시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공립학교가 문맹자나 극빈자의 자녀들을 받아들이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나 오히려 ‘언어오염’을 우려한 중상층 자녀들의 사립학교로의 이반을 야기시켜 공교육의 슬럼화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교육기회가 원천적으로 적은 계층들에게 ‘구어’와 ‘문어’의 괴리감이 한층 더해지고 “브라질 사람은 포르투갈어를 못한다.”라는 열등의식을 부추긴다. 브라질에서 언어적 편견과 차별이 작용하는 가장 심각한 부분은 빈곤이 인지적, 정신적 결함과 상호관련성이 있다고 믿게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 아래에서 필연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온전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규범언어 사용에 대한 평가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로 확장이 된다. 규범을 벗어나 올바르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능한 개인이 된다. 규범 문법이 국민국가 내부의 식민주의이자 제국주의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라볼 때, 국어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체계이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어 권력을 갖게 되면 그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불평등과 차별의 근원이 된다. 언어가 권력과의 관계에 있어 지배수단으로 작용함은 언어가 ‘두꺼운 언어’로서 그 문법, 의미, 용법 등이 사회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결정되어 그 결정이 정당하고 표준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개인의 ‘얇은 언어‘를 제한하고 억압할 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말에서 글로, 듣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20세기는 라디오, 텔레비전이 등장하고, 오늘날은 인터넷과 유튜브 등 다양한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주체성 변화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과거부터 ‘두꺼운 언어’가 주는 권위에 주눅이 든 브라질 국민들이 ‘얇은 언어’의 천국시대에 어떤 주체성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 흥미롭다. 과거의 두꺼운 언어세계에 갇힌 사람에게 이러한 프레임의 변화는 당혹스럽고 불편한 위기이지만 얇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에겐 위기가 아니라 변동의 기회인 셈이다. 임두빈 부산외국어대학교·중남미지역원 브라질 상파울루주립대(UNESP)에서 응용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된 관심은 브라질(사람들)이 현실을 구성하고 인지하는 개별적인 방식과 생각의 문법을 ‘건설적 편집증’을 가지고 기록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주요 논문으로 『브라질의 언어와 민족정체성』, 『일상에서 교환되는 브라질 제이칭뉴의 사회문화적 기능』(공저), 『브라질의 일상 대중적 문화소 근원에 대한 연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브라질 사람과 소통하기』(공역), 『브라질 사람』 등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대학지성 In&Ou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대학지성 In&Out(http://www.unipres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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