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10 09:44:51 조회수 : 1,914
국가 : 아르헨티나

피노 솔라나스 감독의 <구름 (La Nube, 1998)> 이란 영화를 보면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엔 1년 내내 비가 내리고 있으며 그 비구름이 차츰차츰 내려와 우리 머리 바로 위까지 다다라 좀 있으면 우리를 아예 덮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은 90년대 아르헨티나의 억눌린 현실을 특유의 영화적 상상력으로 은유한 것이다. 그런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 인상이 정말 그 영화 속 대사 같았다. 여기 6월은 겨울이라 상당히 추운데 이상하게 또 비가 자주 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라 플라타 강을 끼고 있어 원래 습한 이 도시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습기로 꽉 찬 데다 그 비를 뿌리고 있는 하늘의 구름들은 정말 이 도시를 내려 덮고 있는 것 같았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탱고의 발상지로 노래나 영화 등에서 낭만적인 도시, 돌아가고 싶은 그곳으로 수없이 언급 된 터라 휴가철엔 호텔을 잡기 힘들 정도로 관광객들이 몰려 오는데 사실 그 이면에는 어두운 구석도 많은 곳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관람 문화를 즐기기엔 최적의 도시인 것도 부인할 수 없는데 일단 이 도시의 상징인 오벨리스크 가까이에 극장 자체가 볼거리인 콜론 극장이 있다. 내가 갔을 땐 극장 단원들의 장기 파업 끝에 한 해는 그냥 문을 닫고 극장 보수를 하기로 해 아무 공연도 보지 못했는데 멕시코의 베야스 아르테스와 같은 내부 장식을 한 벨 에포크 시대에 만들어진 공연장으로 전속 발레단, 오페라단 등의 수준 높은 공연을 감상할 수가 있다.

그런 클래식이 부담스럽다면 영화관을 가도 좋은데 오벨리스크 주변엔 예술 영화 전용관도 여럿 있어 코리엔테스와 디아고날 노르테 대로가 만나는 코너에 있는 Cines Arteplex, 그리고 오벨리스크 건너 Suipacha 거리에 Complejo Tita Merello 라는 전용관이 있어 시간만 나면 여기로 뛰어 들어가 평소 보기 힘든 라틴아메리카 영화들을 보곤 했는데 극장 자체는 낡았고 관객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 이러다 문닫는 거 아닌가 걱정을 했지만 그래도 옛 것을 워낙 아끼는 아르헨티나라 그런지 3년여에 걸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갈 때마다 그 자리에 건재해 있어 안방처럼 익숙하게 드나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추천하고 싶은 코스가 대중 가수 공연으로 아르헨티나에는 일단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인기를 끄는 뛰어난 뮤지션들이 많고, 다른 나라의 뮤지션들도 원정 공연을 많이 오는 편이라 역시 오벨리스크를 통과하는 코리엔테스 대로의 페예그리니 (Pellegrini) 역 주변의 공연장을 가면 늘 콘서트나 공연이 준비되어 있고 마데로 항 근처의 ‘루나 파크 (Luna Park)’ 또한 1년 내내 공연 스케줄이 짜여 있는 전문 콘서트 장이다. 다만 이런 공연들은 밤새 놀고 돌아다니는 아르헨티나 사람들 특성상 일찍 시작해봐야 밤 9시고, 보통 밤 10시 이후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이런 음악 공연도 별로 안 좋아한다, 난 그저 화끈한 스포츠나 즐기고 싶다 하면 또 볼 게 천지인 곳이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 일단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두 프로축구팀 Boca Juniors 와 River Plate 의 홈구장이 여기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축구장에 갈 때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해야 한다. 축구장 폭력에 각오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보안 검색이 철저하기 때문에 지갑 외에는 아무 것도 안 가져가는 게 좋다는 말이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멕시코와는 달리 보안 검색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편이나 축구장만은 예외이다. 동네로 보면 River의 홈구장 Estadio Monumental이 더 좋아 보이나 최근에 사고를 워낙 많이 쳐서 경기장내 분위기는 좀 험악할 수 있고 서민 동네에 있지만 최근에 거의 사고가 없었던 곳이 보카 지구에 있는 Boca 팀의 홈구장 La Bombonera이다. 하지만 ‘위험하다, 험악하다’ 해도 단체 응원석과 떨어져 있는 지정석 표를 끊으면 괜찮다.






축구 외에도 볼 것은 많다. 봄여름에 도착한다면 푸른 잔디밭 위에서 말을 타며 공을 모는 마상 구기 경기인 Polo도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이다. 그리고 테니스 경기도 볼 만하다. 한때 세계 랭킹 Top10에 세 명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으뜸가는 테니스의 나라로 2 월에 ATP 남자 프로 테니스 투어 대회가 열리는데 리조트 지구에서 개최돼 부자 관광객들의 관람을 타겟으로 하는 칠레나 멕시코와는 달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투어 대회는 도시 통근 열차를 타고 가서 내리면 바로 도착하는 시내 한 복판 팔레르모 공원 안에서 열린다.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하면 사람들이 가장 환상을 품는 게 역시 땅고(Tango) 아닐까. 영어식 발음을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탱고’ 라 불리는 Tango 는 보카항에서 시작되었는데 사실 그 기원은 우리 생각처럼 우아한 사교 댄스가 아니라 선술집에서 창녀와 건달들이 추던 다소 ‘상스러운’ 춤이었다. 그것이 ‘색다른 재미가 있더라’ 해서 유럽 사람들이 흉내를 내어 추되 스타일을 조금 바꾸어 무난한 사교춤으로 둔갑시킨 것이 ‘콘티넨탈 탱고’로 스포츠댄스나 사교댄스에서의 탱고는 이 콘티넨탈 탱고를 주로 춘다. 사람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듯 미묘한 소리를 내는 반도네온이란 악기를 쓰고 악보를 출판할 때 여성의 반 누드 사진을 붙여서 출판한 데서도 볼 수 있듯 초기 아르헨티나 탱고는 하층 문화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탱고 리듬에 가사를 붙여 삶의 애환을 노래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대중화하게 되는데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20세기 초반의 명가수 겸 작곡가 카를로스 가르델이고 실내악과 탱고를 접합하여 연주음악으로서의 탱고를 개척해 탱고를 음악의 한 장르로 끌어올린 이가 후세대의 아스토르 피아솔라로 둘은 아르헨티나 탱고계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탱고를 즐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일단 탱고의 발상지 보카 지구의 탱고 바들이 있다. 초창기 탱고바의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그만이지만 춤 실력과 연주 실력이 최상급인 건 아니라 조금 더 높은 수준의 탱고를 보고 싶다면 가르델이 자랐던 곳이라고 지하철 역 이름도 ‘카를로스 가르델’ 이 된 아바스토 지구에 있는 탱고 전문 공연장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여기도 나름 조심은 해야 되는 게 말이 탱고지 가끔은 아주 실험적인 공연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전 스웨덴 왕립 발레단 출신의 현대 무용 안무가가 전위적으로 안무를 한 ‘물의 탱고’ 공연을 보러 갔더니 한 관광 가이드가 일본인들로 보이는 나이 많은 장년의 단체 관광객들을 죽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탱고 보여준다고 여길 데려온 모양인데 그 사람들이 이 오묘하기 짝이 없는 현대 무용 작품을 보며 얼마나 지겨웠을지 뭐 저리 센스 없는 가이드도 다 있나 싶었다.
그냥 일반적인 수준의 탱고 공연으로는 보르헤스 문화 센터에서 한달 정도 단위로 탱고 전문 팀과 계약을 해 요일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하는 공연도 괜찮다. 나는 여기서 세 커플의 무용수에 전속 연주팀이 딸린 Bien de Tango 팀의 공연을 봤는데 리듬이 복잡해 스텝 잡기가 힘든 피아솔라의 곡에 맞춰서도 노련하게 춤추는 댄서들을 보니 프로가 달리 프로가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본 탱고 공연으로서는 2006 년의 마지막날 오벨리스크의 야외 무대에서 했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콜론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최고였음에 틀림없으리라. 다니엘 바렌보임은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클래식 음악계의 거장 중 한 명인데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나중에 이스라엘로 귀화한 케이스다. 유럽의 신년에 맞춰 생중계도 되었던 이 공연의 탱고 음악 연주야 정말 좋았다. 거장 바렌보임이 정성껏 편곡한 가르델과 피아솔라의 곡들에다 ‘탱고의 성가 (himno)’ 라 불리는 라 꿈빠르시타(La Cumparsita) 까지… 이 곡은 워낙 유명해서 우리나라 카바레에서까지 악단들이 연주하곤 했는데 그게 그저 ‘쿵,짝,짜,짜’ 하는 그런 단순한 곡이 아니라 나름 섬세한 표현을 지닌 곡임을 바렌보임의 연주를 통해서 알았다. 나중에는 명 탱고 댄서들인 모라 고도이와 후니오르 세르빌라 (Mora Godoy, Junior Cervila)가 나와 ‘아르헨티나 탱고란 이런 것’ 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가 막힌 춤까지 보여주었으니 뭘 더 바라랴.



하지만 공연 중간에 바렌보임이 했던 한마디는 좀 껄끄럽게 들렸는데 그의 말인즉슨 ‘아르헨티나는 유럽 사람들이 만든 나라나 마찬가지지요’. 일단 다민족 이민 국가에서 공적으로 할 말한 말은 아닐 뿐더러 바렌보임 같은 유대인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는 사고 방식을 딱 보여주는 말인 듯해 거북스러웠다. ‘우리는 아시안이 아니라 유럽 사람이야, 백인이야’ 라는 말처럼 들렸는데 히틀러가 좋아했던 음악이란 이유로 이스라엘에서 금기시되던 바그너의 곡을 최초로 연주한 용기 있는 사람도 바렌보임이었으니 정치 감각이 없는 예술가의 별 뜻 없는 말이라 그냥 넘어가는 게 도리일 것 같고 견디기 힘들었던 더위와 가끔 감상을 방해하던 외국인 관광객들의 소란을 제외하고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탱고 연주회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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