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6:20:29 | 조회수 : 6,298 |
국가 : 베네수엘라 | ||
허석열(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1. 시몬 볼리바르 사상과 그 역사적 배경 베네수엘라 태생의 시몬 볼리바르는 널리 알려져 있듯 19세기 초에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5개국을 스페인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킨 영웅이며 그 당시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신생 세력이었던 북미 합중국에 맞설 수 있는 남미 합중국인 그란 콜롬비아를 기획한 정치가였다. 그란 콜롬비아 기획은 지역색이 강한 남미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지향했던 남미통합의 비전은 21세기에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주도한 볼리바르 혁명으로 재생되었다. [사진] 시몬 볼리바르
차베스는 그가 주도한 정치적 기획을 볼리바르 혁명으로 명명하였는데 이는 남아메리카 전체에서 좌, 우파를 막론하고 존경받고 있는 볼리바르가 지닌 상징적 자산을 영유함으로써 그 혁명과정의 정당성을 대중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베네수엘라 혁명의 많은 요소들에서 볼리바르의 비전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러한 시도는 실패했을 것이다. 차베스가 시몬 볼리바르를 21세기의 상황에서 다시 호명한 것은 볼리바르가 식민지 해방전쟁에서 내걸었던 탈식민화라는 과제의 해결이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볼리바르 자신의 출신 계급이었던 식민지 태생 백인인 크리오요는 식민지 해방전쟁에서 메스티소, 인디언, 흑인노예 등의 다른 계급을 해방투쟁에 끌어들였다. 볼리바르가 이끄는 해방군은 신생독립국인 아이티군의 결정적 원조를 받았다. 해방노예들이 식민모국인 프랑스와 싸워 독립을 쟁취한 아이티는 원조조건으로 노예제의 폐지를 요구하였고, 유럽체재 중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볼리바르는 그 조건을 받아들여 아이티의 군사원조를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스페인으로부터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미 각국은 식민모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아메리카 대륙의 새로운 강자인 미국의 영향권 내에 들어갔고 미국에 대한 종속이 강화되어 신식민지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이와 함께 한 때는 이베리아반도 출신자들인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으로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던 크리오요, 메스티소, 흑인 집단은 크리오요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계급질서 속에서 재편되었다. 리베르타도르(해방자)라는 최상의 존칭을 획득한 볼리바르의 그란 콜롬비아 기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베네수엘라 공화국의 정치권력자만이 아니라 그가 해방시킨 다른 안데스 국가들의 권력자인 카우디요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볼리바르의 이름을 소환하였다. 그리하여 볼리바르라는 이름은 권력자가 필요할 때 불리어지는 생기 잃은 상징으로, 독재자의 월계관을 빛내주는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그런데 20세기 말에 볼리바르의 업적과 사상에 대한 재해석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우고 차베스가 볼리바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진행한 혁명 때문이다. 최근 영국의 버소 출판사에서 “차베스의 제시한 시몬 볼리바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차베스가 자신의 저작이나 연설 속에서 볼리바르를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시몬 볼리바르는 남아메리카의 해방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해방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었던가? 사실 시몬 볼리바르의 해방사상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따라서 볼리바르 역시 그 당시 사상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공화주의자이긴 하였으나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볼리바르가 볼리비아 제헌의회에서 한 연설을 보면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 연설에서 그는 종신대통령제를 옹호하였으며 민주주의는 라틴 아메리카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민주주의가 무정부주의와 혼란을 가져오고 제국주의에 복속하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강력한 북미연방에 대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재적 정치권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 자신이 강력한 종신 독재자가 되기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볼리바르를 남미 공화주의의 선구자로 부를 수는 있으나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부르기는 어렵다. 볼리바르가 유럽 계몽주의 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외삼촌과 누나 집에서 자라면서 그의 가정교사로서 알게 된 시몬 로드리게스를 통해서였다. 비록 아시엔다(영지)를 소유한 카리오요 출신이지만 그는 당시 식민지적 상황에서 단순히 스페인 출신 귀족들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성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관념을 지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은 이런 개인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페인 유학과 뒤이은 파리 체재기간 동안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계몽사상가들의 저작과 아담 스미스의 저작을 정독하였다. 특히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그가 여행 중에 항상 지참하는 애독서였다. 이처럼 볼리바르는 시장과 개인의 경제적 자유라는 가치를 옹호하였고 당시 아시엔다 경제와 흑인 노예를 사용하는 코미엔다 제도에서 자유주의는 자신의 출신계급인 크리오요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에서 공부와 사교생활에 전념하다가 1805년 로마의 몬테 사크로에서 그의 스승인 시몬 로드리게스가 보는 앞에서 앞으로 스페인 지배로부터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키는데 모든 힘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한다.(몬테 사크로의 맹세) 몬테 사크로의 맹세를 계기로 볼리바르는 해방 투사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이때부터 볼리바르는 문인이 아니라 혁명무력을 지휘하여 스페인군을 몰아내는 군사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스페인 식민세력을 축출하고 베네수엘라 등 안데스 5개국을 포괄한 그란 콜롬비아를 일시적으로 구성하는 등 거대한 성취의 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해방하고 북진하여 페루에서 스페인 왕당파 군대와 싸우고 있던 산마르틴(후안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가 만나 페루의 장래에 대해 과야킬에서 회담한 일이다. 과야킬 회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회담을 계기로 산마르틴은 해방전쟁에서 손을 떼고 유럽으로 가버렸다. 볼리바르가 페루의 대통령으로 리마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지금의 콜롬비아 지역인 누에바 그라나다와 베네수엘라 간의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볼리바르가 내전의 누에바 그라나다 쪽 당사자인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권력분할을 수용함으로써 가까스로 봉합되었지만 그란 콜롬비아의 통합은 점점 유지되기 힘들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자유주의자들은 마침내 볼리바르의 암살을 기획하고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란 콜롬비아는 드디어 붕괴되었고 베네수엘라는 그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였다. 가까스로 암살을 피한 볼리바르는 실의의 날을 보내다 1830년 유럽으로 떠나기로 하여 콜롬비아의 카타르헤나에 도착하였으나 곧 병을 얻게 되어 사망하였다.
2. 시몬 볼리바르의 유산 안데스 지역에 단일 국가를 건설하고 궁극적으로는 전체 남아메리카를 포괄하는 연방을 만들려고 했던 볼리바르의 기획은 당시 조건에서 성공할 수 없었으며, 민주주의보다 독재를 선호한 그의 권력관은 남아메리카의 후진적 조건 아래서는 민주주의가 맞지 않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왔다. 당시 남아메리카의 경제적 상황은 산업혁명이 태동하고 있던 유럽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초기 산업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봉건적인 대토지소유제와 이에 기반한 과두권력체제를 공격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시몬 볼리바르는 계몽주의자였기 때문에 그 당시 백인만이 아니라 인디오나 메스티소, 흑인 의 평등권을 옹호하였고 노예제 폐지를 실행하였다. 그가 스페인 식민지였던 베네수엘라에서 목격한 것은 무지, 부패, 인간존엄성의 상실 등이었다. 따라서 스페인 세력이 물러가고 난 다음의 공화국의 과제는 이런 악덕들을 제거하고 모든 사람들이 지혜롭게 되고 정의롭게 살며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들은 추상적으로 제기될 뿐이었으며 현실적인 악덕을 제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악덕들은 남아메리카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끄리오요의 경제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를 권력자들과 지배계급이 활용하긴 하였지만, 시몬 볼리바르의 실천이 대의에 대한 철저한 헌신, 애국주의, 인민들 사이의 우애 같은 도덕적 가치에 입각하고 있음은 망각되었다.
3. 볼리바르 혁명과 시몬 볼리바르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볼리바르 혁명은 이렇듯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볼리바르 사상을 다시 생동하는 이데올로기로 되살려내어 제국주의로부터의 남아메리카의 해방과 남아메리카의 단결과 통합, 사회정의의 달성이라는 현대적 과제의 맹아를 시몬 볼리바르의 사상과 실천으로부터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을 심화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차베스는 자신을 축출하려 한 2002년의 쿠데타와 석유 산업에서의 사보타지가 실패로 돌아간 후 “우리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를 발의하였다. 이 구상은 볼리바르가 전망한 남아메리카 통합의 추진력을 남아메리카의 엘리트층이 아니라 민중에서 재발견하고 남아메리카 민중의 연대에 의한 교역질서를 만들어냄으로써 밑으로부터 통합을 만들어내려는 기획이며 이런 기획은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국제적 자본의 이윤 욕구에 따른 교역질서에 대한 대안을 형성하고 있다. 차베스와 피델 카스트로에 의해 공동 발의된 ALBA의 시행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쿠바 독립을 위한 투사였던 호세 마르티와 시몬 볼리바르의 사상이 서로 비교되고 융합되었다. 호세 마르티는 시몬 볼리바르가 사망한 후 23년이 흘러 쿠바에서 탄생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활동한 시기의 역사적 발전단계는 달랐다. 그러나 호세 마르티가 활동한 19세기 말까지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두 사상가의 사상은 공통점이 많다는 점이 양국의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양국의 학자들은 두 사람의 사상과 실천이 모두 단순히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에 향해진 것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의 실현, 고양된 인간성의 발현이라는 계몽주의의 요청을 함축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진] 시몬 볼리바르 동상
차베스는 생전에 자신이 방문한 나라의 국가원수들에게 “볼리바르의 검”을 수여하기도 하였는데, 이 검을 수여받은 국가원수들 중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가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볼리바르가 차고 다녔다는 칼은 반제국주의와 세계질서의 다극화에 공이 큰 국가지도자들에게 수여되었는데, 이와 같이 차베스가 상징에 동원한 볼리바르의 이미지는 미국의 단일 패권에 맞서 세계의 다극화에 힘쓴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시몬 볼리바르의 시대는 미국 패권의 시대가 아니었으며 미국은 여러 유럽 국가와 경쟁하는 신흥세력이었을 뿐이다. 우고 차베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볼리바르의 저작 중에서 그가 추진했던 21세기 사회주의의 단초로 해석될 구절들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1819년 스페인군과의 격전지였던 앙고스투라에서 한 연설을 인용한다. “자연은 인간을 그 능력이나 기질, 근력 등에서 불평등하게 만들었지만, 법은 인간에게 교육, 산업, 봉사, 도덕 등을 통해 그 불평등을 교정한다...”는 구절이 고타강령 비판에서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이 발전된 사회주의 사회에서 권리의 불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마르크스가 말한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차베스는 볼리바르를 사회주의 이념을 마르크스보다 먼저 선취한 선구자로 내세우려 시도한다. 사실 어떤 사상가의 사상도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 예수 역시 우리가 상정해볼 수 있지만 이는 보수적 기독교인이 성경을 독해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의 독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실제로 차베스는 예수와 마르크스, 볼리바르를 다 인간해방의 사상가로 내세우고 있다. 볼리바르가 1815년 자메이카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작성한 “이 섬(자메이카)의 신사(영국 총독)에게 보내는 답신”은 20세기 말에 영어본이 먼저 발견되었고 21세기 초에 스페인어 원문이 발견되어 연구되고 있다. 그 편지에서 볼리바르는 1810년에서 1815년 사이의 해방전쟁의 전황을 정리하면서 유럽인들이 오리노코강 어귀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까지 남아메리카 민중의 해방투쟁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서신은 볼리바르가 이미 1815년 경에 자신의 투쟁이 남아메리카 전체를 위한 투쟁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4.맺음말
시몬 볼리바르의 이미지는 남아메리카의 정치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되면서 소비되거나 수용될 것이다. 마치 체 게바라의 이미지가 여러 맥락에서 수용되고 소비되듯이 시몬 볼리바르 역시 다면적인 수용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21세기적 수용은 바로 볼리바르가 끝까지 추구했던 핵심적 사항, 즉 남아메리카 인민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현재 남아메리카가 겪고 있는 구체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노력과 결합해서 나타날 것이며 우고 차베스의 볼리바르주의는 그 생생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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