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6:15:31 조회수 : 3,298
국가 : 엘살바도르


 

노용석 (前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現 부경대 조교수)

 

전 세계적으로 엘살바도르라는 나라는 국토의 면적만큼이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곳임에 틀림이 없다(전체 국토의 면적은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보다 적다). 하지만 이러한 '小國'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시기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진행되었던 엘살바도르 내전이었다. 전 세계인들은 '살바도르(Slavador)'라는 영화를 통해 엘살바도르 내전의 실상을 약간 접하기도 했지만, 이 전쟁의 실상은 영화보다 더욱 참혹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1992년 내전이 종식된 이후 엘살바도르 진실위원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12년 내전기간 동안 약 75,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40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동체가 파괴되는 경험을 하거나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엘살바도르 내전의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내부적으로는 근대국민국가 독립 이후부터 끊임없이 지속되어온 과두체제 집단과 민중 사이의 투쟁이 외형적으로 충돌한 것이라 볼 수 있고, 외부적으로는 대공산주의 정책에 있어서 중미(central america) 지역을 빼앗길 수 없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가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미국은 선행된 쿠바(1959년 혁명)와 니카라과(1979년 혁명)의 사례를 교훈삼아 과테말라 및 엘살바도르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움켜잡기 위해 천문학적인 군사원조를 실시하였고, 이러한 군사원조 중 많은 부분이 내전을 격화하는데 사용되었다.


몬떼로사 중령은 바로 이러한 엘살바도르 내전에 있어서 우익과 정부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63년 헤라르도 바리오스(Gerardo Barrios) 군사전문 학교를 졸업하면서 '전형적인'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이후 파나마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의 군사고문관으로부터 군사학적 측면의 교육을 받게 되고, 이후 대공산주의 반란진압 전술을 공부하기 위해 타이완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엘살바도르 최초의 낙하산 강하 부대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엘살바도르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가 아니었던 기독민주당의 두아르떼 후보가 '명백한' 부정선거로 패배할 당시, 힘으로 권력을 장악한 몰리나 장군의 측근으로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몬떼로사의 명성이 확인된 계기는 엘살바도르 내전이 본격화되던 1981년 엘살바도르 정부군에 의해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이 진행되면서부터였다. 1981년 10월 이후부터 엘살바도르 내전의 반군이었던 FMLN은 자신들의 근거지를 동북부 모라산 지역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하였다. 이에 당시 엘살바도르의 국방장관이었던 가르시아와 국방차관 가스띠요 등은 모라산 지역에서 게릴라 근거지를 섬멸한다는 목적 하에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하게 된다. 이 작전에 전격적으로 투입된 엘살바도르의 부대는 아뜰라까뜰(Atlacatl)이었는데, 이 부대는 1981년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진행된 군사원조의 일환으로 대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게끔 훈련된 부대로서, 1981년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 브래그 기지에서 미국의 특전부대로부터 훈련을 받은 바 있다. 이 부대의 최고 지휘자가 바로 몬떼로사 중령이었다. 주변의 증언에 의하면 몬떼로사는 상당히 '희귀한' 성격을 가진 자로서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모라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게릴라 세력을 섬멸하고 대정부 비방 방송을 실시하고 있던 FMLN의 라디오 방송국 벤세레모스를 파괴하는 것 뿐이었다.


결국 모라산 지역에서 진행된 아뜰라까뜰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1982년 11월까지 약 1,000여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의 마을이 파괴되어 많은 생존자들이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몬떼로사의 게릴라에 대한 강박관념은 이러한 학살로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모라산 지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전 세계(심지어 미국 내부까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984년까지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철저히 수행해 나갔다. 당시 모라산 지역의 주민들에게 몬떼로사는 '왕'과 같은 이미지였으며, FMLN에게는 반드시 사살해야 할 '복수의 대상'이었다. 몬떼로사는 1984년 기독민주당의 두아르떼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전을 종식하기 위한 협상을 FMLN과 진행하고 있을 때에도, 다시 모라산 지역에서 '또로라 Ⅳ(Tolora Ⅳ)'라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감행하였다. 당시 몬떼로사는 뉴욕타임즈의 기자에게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말을 하며, 엘살바도르 내전의 종식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1984년 10월 23일, '또로라 Ⅳ' 작전이 한창 수행 중이던 시기에 몬떼로사는 게릴라의 송신기(transmitter)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동하였다. 몬떼로사는 이 귀중한 '전리품'을 이용해 게릴라를 섬멸하겠다는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FMLN의 지도자였던 비야로보스의 증언에 의하면, 이것은 철저히 계획된 함정으로서 송신기에는 FMLN이 제작한 특수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었다. 결국 몬떼로사는 자신의 헬기 안에서 무선조종기로 조작된 부비트랩의 폭발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1980년대 전 세계 냉전을 주도하였던 '한 군인'이 사라진 것이다. 현재 모라산에 위치한 '살바도르 혁명 박물관'에는 당시 몬떼로사가 타고 있던 헬기의 파편이 아직까지 전시되어 있다.


역사는 구체적 사실의 연속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으며, 때로는 개인의 일생을 통해 그 상황을 더욱 현실적으로 직시할 수도 있다. 엘살바도르 내전의 역사에서 몬떼로사와 같은 '충직한 군인'들이 결과적으로 그들의 역사에 공헌한 바는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이 부분은 2012년 현재 엘살바도르 정권을 장악한 FMLN이 향후 어떠한 평가를 내리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몬떼로사는 1984년 사망 후 국회로부터 '전쟁영웅'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몬떼로사 중령

아뜰라까뜰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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