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6:12:52 조회수 : 1,970
국가 : 아르헨티나


 

조영실(前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Juan Bautista Alberdi, 1810~1884)는 문인이자 법학자로 아르헨티나 공화국 최초의 헌법을 만든 사람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1853년 채택된 연방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인물이다. 주목할 것은 ‘공화국 최초’의 헌법이라는 사실과 ‘연방’을 기조로 한 헌법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1853년 헌법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알베르디라는 인물을 살펴봄에 있어, 이 헌법이 탄생하기 전의 역사적 상황, 폭정과 혼란기의 알베르디의 행로, 1853 헌법 초안의 맥락, 이 헌법에 반영된 알베르디의 사상 등의 순으로 풀어보기로 한다.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가 그랬듯이 아르헨티나는 1810년 독립혁명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헌정수립이 조속히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공화국 수립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러야 했다.

1816년 투쿠만 의회에 모인 라플라타 각 지역 대표자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고 ‘라플라타 연합주’ 결성을 결정했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라플라타 전 지역이 하나의 단일국가로 수립될 것을 주장함으로써 전 지역의 연합체를 주장하는 내륙 주들과 대립했다. 181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소집된 투쿠만 의회에서는 최초의 대헌장(Carta Magna)을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통합주의적 헌정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내륙 주들은 이에 반대했고, 결국 이 대헌장은 라플라타 연합주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최초의 대헌장은 중앙집권주의적이었을뿐 아니라 친군주제적이고 귀족적이기도 했다. 따라서 내륙 주들은 이 헌장의 승인에 반대했다. 특히 산타페 주 주지사 에스타니슬라오 로페스는 이 헌장에 공화주의적이고 연방주의적 정부를 구성하고 그 대표자들을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내륙 주들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이후 반세기 동안 아르헨티나가 중앙집권파(Centrales)와 연방파(Federales)로 분열되어 물리적 충돌로까지 이어지는 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중앙집권파와 연방파의 분열과 무력충돌은 1835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라는 독재자의 출현을 야기했다. 1829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맡고 있던 로사스는 두 세력의 대립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아르헨티나의 권력을 잡았다. 로사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농장주로서,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육류와 가죽 등으로 얻는 이익을 십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로사스는 연방주의를 표방함으로써 내륙 주 연방주의 세력을 일부 포섭해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로사스 집권기 아르헨티나의 공식 명칭이 ‘아르헨티나 연방(Confederacion Argentina)’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기실 로사스는 엄밀한 의미의 연방주의자가 아닐뿐더러 내륙 주의 연방주의와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한정된 연방주의를 채택했다. 다시 말해 연방주의자들이 주장한 ‘각 주의 자치권’이라는 테제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자치권’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곧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의 자유로운 이용권을 공유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로사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치주의는 한편으로는 정통 연방주의자와 대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주의자(중앙집권주의자)와 대립했다. 그러나 20년에 가까운 로사스의 폭정과 비밀경찰을 통한 학살,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익 중심의 통치는 결국 우르키사(Justo Jose Urquiza)라는 부하의 반란을 불러왔다. 엔트레리오스 주지사였던 우르키사는 1852년 카세로스 봉기를 통해 로사스를 패퇴시키고 아르헨티나 연방을 인수했다.

 알베르디의 헌법초안은 이 시기에 작성되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우르키사에게 직접 보내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우르키사를 통해 재조직될 아르헨티나 연방의 방향에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음이다. 이 초안의 제목 『아르헨티나 공화국 정치조직화의 기초와 출발점 Bases y Puntos de partida para la Organizacion Poltiica de la Republica Argentina』에서도 알베르디의 의도와 의지를 능히 알 수 있다. 우르키사가 카세로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던 시점에 알베르디는 로사스의 폭정을 피해 우루과이로 유럽으로 칠레로 망명생활을 하며 집필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소위 ‘37세대’ 멤버였던 알베르디는 망명지에서 글을 통해 반로사스 투쟁을 하고 있었다. 37세대란 로사스의 학정을 비판하던 일군의 계몽주의적 자유주의 지식인 청년들이 1837년 만든 그룹이었다. 이들은 로사스의 탄압이 심해지자 대부분 망명길에 올라 집필활동을 통해 투쟁을 계속했다.

아르헨티나 교육의 대부이자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파쿤도. 문명과 야만 Facundo. Civilizacion o Barbarie』의 저자이기도 한 사르미엔토(Domingo Faustino Sarmiento), 사회적 낭만주의 소설『도살장 El Matadero』의 저자 에체베리아(Esteban Echeverria)가 알베르디와 더불어 37세대의 대표적 멤버였다.

 알베르디는 1810년 투쿠만 주 태생이다. 1810년은 독립혁명이 일어난 시기였고 투쿠만은 최초의 의회가 소집된 곳이었으니 알베르디는 어쩌면 독립혁명 정신을 타고난 셈이었다. 게다가 그의 부친은 독립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의 하나인 마누엘 벨그라노의 친위세력이기도 했다. 우르키사는 알베르디의 『아르헨티나 공화국 정치조직화의 기초와 출발점』의 제안을 수용했고, 이는 1853년 헌법에 대폭 반영되었다. 1853 헌법에 반영된 알베르디 사상의 핵심은 크게 연방주의와 유럽인 이민정책이다. 먼저 알베르디의 연방주의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그의 태도는 일종의 선회였다. 유럽식 고등교육을 받은 알베르디는 유럽식 문명화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자였다. 따라서 37세대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의 통합주의를 표방했다. 통합주의에 대한 지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지방 카우디요였던 로사스의 폭정을 경험한 결과이기도 했다. 즉 연방주의는 지방 카우디요들의 횡포와 무분별한 권력 남용을 가능하게 하여 아르헨티나의 문명화를 불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공화국 수립의 방해물이 될 뿐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베르디는 우르키사의 승리 이후 연방주의를 지지하게 된다. 사르미엔토와 에체베리아와 같은 다른 37세대 동지들이 여전히 중앙집권주의를 고수했던 것에 비하면 맥락을 살펴볼 만한 의미있는 변화다.

 알베르디는 무엇보다도 과거의 비생산적인 싸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주의 자유와 국가 전체의 특권을 감싸안고 조화시키는” 혼합 체제를 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연방주의 공화제 모델을 고려했지만, 아르헨티나의 현실에 알맞은 연방주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말하는 연방이 단순한 연대 이상의 결속임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연방주의의 합의가 “양도가 아니라 설득과 납득을 통해” 가능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 스스로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와 내륙 주 중심의 연방주의가 갈등해온 세월이 화해무드로 발전하기에 상호간의 노력이 필요함을 명시하는 것이다. 그는 중앙정부를 통해 전 국가에 걸친 하나의 체제라는 통일성을 기할 수 있고, 지방 정부들은 지역의 주권을 갖고 그 지역의 정치적, 행정적 자율성을 꾀할 것을 구상한다. 이 때 중앙정부든 지방 정부든 공화국의 연방법에 의해 그 주권이 제한될 수 있는 혼합 정부 방식을 주장한다.

 한편 알베르디는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인구정책에 관해 비전을 제시한다. 그는 “통치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거주시키는 것(Gobernar es poblar)”이라는 유명한 테제를 통해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인구증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독립 후 공화국 수립을 위해서는 기존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던 곳에 사람을 이주시킴으로써 그 영토를 국가의 범주 안으로 확고히 편입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희소한 아르헨티나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이민이 필요했다. 그는 우르키사에게 “우리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창조의 정책, 인구정책, 다시 말해 고독과 사막을 정복할 정책이 필요합니다.”라고 강력히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알베르디는 외국에서 들여올 이민자는 유럽의 선진국의 전문적 기술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제기한다. 앵글로색슨계나 독일계, 북유럽인에 대한 이민 장려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야만성을 문명화함으로써 근대국가로 성장하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알베르디는 이민정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종교적 자유와 관용, 그리고 공화국 내의 육로와 강안을 통한 자유로운 교역을 보장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헌법이 보장하는 이민의 가능성을 민법과 상법 등에서도 보장해야 한다고 대비하고 있다. 즉, 민법과 상법상의 제약을 줄여 이민자들이 산업 증진과 교역의 촉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르헨티나 헌법에 이민정책이 명문화되었다.

 우르키사는 연방주의를 체제화했고, 알베르디가 기초한 1853년 헌법을 연방 헌법으로 제정하고 그 해 아르헨티나 연방의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우르키사의 아르헨티나 연방이 아르헨티나 공화국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연방파의 공화국 지배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53년 아르헨티나 연방헌법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1862년까지 아르헨티나의 연방주의/통합주의 갈등은 연장되었다. 그리고 186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미트레(Bartolome Mitre)에게 우르키사가 패함으로써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 연방을 병합하는 형태로 통일을 이루면서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비록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수립되기는 했지만 아르헨티나 공화국은 알베르디가 바라던 대로 연방제적 공화국 형식을 띠게 되었고, 또한 그의 초안이 반영된 1853년 헌법은 오늘날까지 몇 차례의 개정을 거듭했지만 그 핵심적인 내용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다른 대부분의 유럽식 계몽주의자들과는 달리, 중앙집권주의를 주장하던 초기의 태도를 시대적 상황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통해 변경하고 연방주의를 주창한 알베르디의 소신과 용기가 있었기에 오늘날 연방제적인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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