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5:56:35 조회수 : 1,701
국가 : 페루


황수현(경희대학교)

 

  “ 마리아떼기가 누구인지 모르세요?
                  아메리카의 새로운 빛이지요"

  프랑스 소설가 앙리 바르뷔스(1873-1935)의 헌사가 묘비명으로 새겨져 있는 리마 근교의 공동묘지, 그곳에 영원한 청년 마리아떼기가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0주년이 되는 2010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라틴아메리카의 희망을 전파한 마리아떼기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적어도 마리아떼기에겐 그렇다. 페루의 작가, 정치가 호세 까를로스 마리아떼기(1894-1930)는 보통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는 가난했고 사고로 다리를 절었으며 서른에는 다리를 절단하고 남은 생애동안 휠체어에 의존하여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불구자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불구자로 기억하지 않고 20세기 초반 라틴아메리카와 페루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주의자, 작가로 기억할 뿐이다. 그의 생애 초반부는 얼핏 시인이자 소설가인 장정일을 떠올리게 한다. 16세에 서점에 취직하여 엄청난 양의 독서를 통해 작가의 꿈을 키운 장정일 처럼 마리아떼기는 15세가 되던 해에 일간지『라 쁘렌사 La prensa』에

보조로 취직하여 교정과 잡일을 거들며독서를 통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열리고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후안 끄로니께르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정치 투쟁에 관한 글을 쓰게 되자 당시의 레기아 정부는 눈에 가시 같던 기자 마리아떼기에게 유럽 유학의 당근을 제시한다. 유럽 유학은 그의 인생에 있어 일대 전환기가 되어 마리아떼기는 파리에서 앙리 바르뷔스를 만나고 이탈리아에서 다눈치오, 미래파 운동을 이끌었던 마리네티와 교류하며 당대의 선진적인 문물과 조우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 멤버 중 하나인 안토니오 그람시와의 만남은 그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확신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마리아떼기는 4년 간의 유럽체류를 마치고 1923년 귀국하여 페루에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다. 1928년 페루 사회당(P.S.P)을 창당하고 『페루 현실분석을 위한 일곱 편의 글』을 발표하여 페루의 경제적 현실과, 인디오, 토지, 교육, 중앙 집권과 지방 분권에 관한 문제를 논하고 당대 문학에 대해 분석한 글을 내어 놓는다.
  마리아떼기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천명했으나 이론의 교조적 적용이 아니라 페루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한 후 현실에 맞서 혁명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당위론에 입각하여 사회주의를 라틴아메리카 실정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페루의 특수상황 즉, 산업화가 주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디며 노동자의 정치의식이 약한 현실을 인식하고 농민, 원주민, 도시 빈민을 포함하는 광범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의 사회주의 사상이 가지는 특별함이 있다면, 그것은 잉카제국으로 비롯된 혈통적 연대 즉 인디오를 통한 자기정체성 모색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리아떼기가 1920-30년대의 페루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인디오들이 지닌 역할을 인식하고 그들을 역사 발전의 주체적인 계급으로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대로서는 진일보한 사고로 평가된다. 구체적으로 그는 인디오 문제를 국가 경제의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인디오의 박탈된 지위를 개선하기위해 토지소유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인디오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인디오가 스스로 경제적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학에서도 리마 (해안)중심의 문학풍토를 비판하며 주변부(산악)지역의 문학을 소개하려 애썼다. 마리아떼기는 " 나의 이상은 식민지 페루도 아니요, 잉카 시대의 페루도 아닌 통합된 페루이다"라고 주장하며 인디오를 포함한 공존의 사회를 건설하고자했다.

  "세상을 향해 열린 창-아마우따"
  퀴닉학파를 창시한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평생 등불을 들고 다닌 것으로 유명한데 사람들이 다가와서 "무엇을 찾습니까" 라고 물으면 "현자 (hombre)를 찾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통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통에서 나와 '사람'을 찾고자 했으나 만나기 어려웠다. 마리아떼기도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들었던 등불을 다시 들고 현자(賢者)를 찾고자 했던 것일까? 그는 잡지의 제목을 고민하다 문득 잉카의 아마우따(Amauta)를 떠올린다. 아마우따는 께추아어로 '낭송자', '조언자' '현자'의 뜻이고 그는 현자(hombre)의 잉카적 표현에서 이름을 따 문예지『아마우따』를 창간한다. 마리아떼기 식 사람 찾기는 디오게네스의 그것과는 달라서 그는 잡지를 통해 신인 작가들을 발굴한다. 산골에서 글을 쓰던 인디오 작가들의 문학 작품이 리마에 소개되며 페루 문단의 脫주변부 현상이 가속화된다. 당대의 화두였던 페루 아방가르드 문학의 논쟁이 장(場)을 만나 심화되고
마르띤 아단과 같은 소년 작가들이 이 잡지를 통해 소개된다. 마리아떼기 자신이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학적 실험이 이루어진 공간은 신진작가에는 그들의 문학적 재능을 부화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였고 기존 작가는 문학적 실험실을 가지고 다양한 시약을 검사해보는 가슴 설레는 창조의 공간이었다. 바다 건너 유럽의 문학 논쟁이 가장 먼저 소개된 곳이기도 하고 마르크스 주의와 노동운동, 인디오 문제 등이 한 편에서 열띤 논쟁으로 점화되고 다른 한편에선 세사르 바예호, 오껜도 데 아마트, 세사르 모로, 사비에르 아브릴의 시가 강물처럼 넘치고 있었다. 아마우따를 이끌던 마리아떼기는 지휘자였다 바람을 부르고 불을 일으키는... 그래서 마리아떼기가 세상을 떠나자 아마우따는 더 이상 발간되지 못한다. 아마우따가 폐간이 되자 페루 전위문학의 빛도 침잠하기 시작한다.

  "왜 다시 마리아떼기인가?"
  정치가, 사상가, 기자, 작가였던 마리아떼기를 앙리 바르뷔스는 '카테고리가 다른 사람'으로 지칭한다. 카테고리가 다른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다를까? 그가 가지는 철학적, 정치적 비전이 남달라서 일까? 자신의 휠체어뿐만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 나갔던 마리아떼기를 오늘 다시 이야기함은 찾을 수 없는 현자를 그리는 것일까?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장경제원리는 자본의 논리에 사회를 종속시키고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저개발의 기억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 구조적 모순을 내재한 채 묘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앞에 오늘 마리아떼기는 어떤 해법을 제시했을까?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과 패러다임의 형성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2010년을 맞으며 다시 마리아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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