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5:54:23 | 조회수 : 1,650 |
국가 : 파라과이 | ||
구경모(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까를로스 안또니오 로뻬스의 초상화와 친필서명 1) 까를로스 안또니오 로뻬스는 파라과이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근대 국가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실제로 파라과이의 독립일은 1811년 5월 14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날은 혁명 통해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남을 선포한 것뿐이다. 파라과이는 여전히 현재의 아르헨티나에 해당되는 리오 데 라 쁠라따 연방주((Provincias Unidas del Río de la Plata)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다. 다만, 아순시온 정부위원회(Junta Gubernativa de Asunción)는 리오 데 라 쁠라따 연방주를 대표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위원회(Junta Gubernativa de Buenos Aires)에 세금을 내지 않고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끄리오요들이 아순시온으로 진격했으나 패하였다. 1813년에는 파라과이에 의회가 구성되고 초대 꼰술(cónsul)로 2) 호세 가스빠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José Gaspar Rodríguez de Francia)를 임명되었다. 그리고 프란시아는 1816년부터 그가 죽은 1840년까지 독재를 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당시의 파라과이가 완전히 독립된 국가의 모습으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 예로 의회에서 제정한 법은 헌법이 아닌 임시정부 법령 수준으로서 시민법도 없으며, 게다가 프란시아는 독립을 명시한 법이나 공식적인 선언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3) 파라과이의 공식적인 독립 선언은 프란시아가 죽은 후, 그의 조카인 안또니오 로뻬스가 권좌에 오르면서 이루어졌다. 그는 1841년에 마리아노 로께 알론소(Mariano Roque Alonso)와 함께 파라과이의 공동 꼰술(cónsul)로 의회의 승인을 받는다. 두 통치자는 1842년에 총 7개 조항으로 구성된 파라과이 공화국 독립 선언문(Acta de la Independencia de la República del Paraguay)을 공표한다. 주요 내용은 파라과이는 외세로부터 독립된 자유헌법국가라는 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안또니오 로뻬스는 1844년에 파라과이 독립에 관한 내용이 담긴 법을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presidente)으로 임명된다. 대통령 임명 이후에는 파라과이의 근대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안또니오 로뻬스는 몇 차례 바뀐 국기 디자인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하였고 국가(國歌)를 제정하였다. 그리고 원주민을 시민으로 편입시켰다. 그는 자국 통화(通貨)와 지폐를 만들었으며, 농업 개혁을 실시하였다. 또한 인쇄술을 도입하고 최초의 파라과이 신문을 창간하였다. 경제 부문에서는 산업화에 중점을 두었다. 쇄국정책을 취한 프란시아와 달리 그는 젊은 인재를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 선진 기술을 받아들였고 영국과 미국, 프랑스와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제철소와 조선소, 철도 등의 산업을 도입하였다. 특히 철도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와 페루, 아르헨티나 다음인 4번째인 1861년에 개통되었다. 안또니오 로뻬스는 영토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1852년과 1856년에 각각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정부를 상대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각 국가간의 이견으로 아래 지도의 빗금 친 부분은 중립지역으로 남겨두었다.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중립 지역은 현재 브라질의 마또 그로스 델 수르(Matto Grosso del Sur)주 일부 지역에 해당되며,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중립지역은 지금 아르헨티나 북동부의 차코 지방에 해당된다. 삼국동맹전쟁 전의 파라과이 영토 4) 안또니오 로뻬스 정부 말기인 1860년대 초에는 중립지역의 영토 문제를 놓고 두 국가와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국가와의 무역마찰과 이민자 문제가 외교 마찰로 비화되면서, 파라과이는 서서히 외교적으로 고립되게 된다. 이러한 대외적인 문제는 1862년에 대통령이 된 그의 아들 프란시스꼬 솔라노 로뻬스(Francisco Solano López)에게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하여 취임한지 불과 2년 만에 발발한 삼국동맹전쟁(Guerra de la Triple Alianza)의 원인이 되었다. 파라과이 사람들은 안또니오 로뻬스 재임 시기를 파라과이 역사상 가장 부국강병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리워한다. 실제로 이 시기의 파라과이는 지금보다 영토도 넓었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서 눈에 띄게 산업화 속도도 빨랐다. 외교적으로도 파라과이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세력과 주변의 강대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대등한 자세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또니오 로뻬스가 파라과이가 약소국으로 전락한 결정적인 계기인 삼국동맹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 http://narraciones.tripod.com/paraguay/cap07.html(검색일 2013년 9월 28일) 2) 여기에서 꼰술(cónsul)은 한 지역 혹은 국가의 최고 권력자를 지칭하며 로마의 집정관과 당시 프랑스 나폴레옹의 직위에서 모방한 것이다. 3) José Manuel Rodríguez, 2011, La independencia del Paraguay no fue proclamada el 14 de Mayo de 1811, Asunción: Editorial Servilibro,
4)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Krigsteater_trippelalliansekrigen.png(검색일 2013년 9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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