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 작성일 : 2017-03-07 15:53:31 | 조회수 : 3,247 |
국가 : 엘살바도르 | ||
노용석(前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현 부경대 조교수) 중미에 위치한 작은 국가인 엘살바도르는 그다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요소가 역사상 없었다. 한국의 경상남북도를 합한 면적보다 약간 크며 인구는 600여 만 명에 불과한 엘살바도르는 라틴아메리카 정치 및 경제에서도 항상 변방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엘살바도르가 전 세계인의 가장 큰 집중을 받은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1980년부터 시작해 1992년에 종결된 엘살바도르 내전 때문일 것이다. 엘살바도르 내전은 전 국토 토지의 절반 이상을 소수 귀족 가문이 소유한 채 극심한 빈부 격차를 조장하고 있었던 엘살바도르 경제에 일차적 원인이 있었다. 권력 및 재산의 소유권에서 배제된 대다수 엘살바도르 민중의 극심한 허탈감은 무장 게릴라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이에 맞서 지배세력은 군부를 앞세워 이를 탄압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다. 1932년 엘살바도르 남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민중봉기를 일으켰던 파라분도 마르티(Farabundo Martí)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rente Farabundo Martí para la Liberación Nacional, 이하 FMLN)으로 명명된 무장 게릴라 조직은 산악지형이 험난한 동북부의 모라산(Morazan) 지역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에 돌입하였고, 군부를 위시한 엘살바도르 정부는 이를 진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엘살바도르 내전의 본질은 위의 두 집단이 무력으로 대립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위의 두 집단 충돌에 동서 냉전의 파괴적 이데올로기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데 있다. 엘살바도르 내전은 20세기 중후반 전 세계에서 발생한 동서 냉전의 '대리전'으로서 가장 악명이 높았으며, 미국과 소련은 각각 엘살바도르 군부와 FMLN에 천문학적인 군사지원 및 원조를 실시하였다. 특히 미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중미지역에서의 '도미노 현상'을 저지하기 위해서 엘살바도르 군부에 막대한 군사자금 및 군사활동 보조를 실시하였다.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이러한 동서 냉전의 측면 효과를 누구보다 피부로 느낀 이들은 바로 엘살바도르 민중이었다. 내전의 명분이 점차 '국제적'으로 확대되면서 엘살바도르에 투입된 수많은 군사원조의 피해 결과는 엘살바도르 민중들에게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군사원조금을 이용해 각종 민병대 조직 및 '특수 암살단'(death squad)을 운용했으며, 이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엘살바도르의 수도인 산살바도르 시내에는 날마다 테러의 희생자와 실종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로메로 신부는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엘살바도르 민중의 가슴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1917년 5월 엘살바도르 산 미구엘의 바리오스 시에서 태어났으며, 초중등 교육 과정을 수료한 후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1942년 4월 4일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로메로는 신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계속 로마에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을 마치기 전인 1943년, 로메로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피해 잠시 귀국길에 오르는데, 돌아오는 과정에 잠시 쿠바 경찰에 의해 억류되어 감금되기도 하였지만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로메로는 아나모로스(Anamorós) 교구 사제로 성직 생활을 시작하지만, 곧 산 미구엘로 위치를 옮긴 후 20년 동안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1970년, 로메로는 산살바도르 루이스 차베스 주교의 보조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로메로의 부주교 임명에 대해 엘살바도르 교회 내부의 의견은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엘살바도르의 진보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모든 성직자들은 로메로의 임명이 교회의 진보적 발전을 방해한다고 생각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977년 2월 23일 로메로가 엘살바로드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엘살바도르 교회는 로메로의 대주교 임명에 상당히 놀라고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로메로가 대주교로 임명된 것을 반기는 측은 당시 군부의 비호 하에 있던 엘살바도르 정부 뿐이었다. 이처럼 1977년까지만 해도 로메로는 진보 혹은 좌파라는 용어와 혼합되기 보다는 보수와 원칙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에는 혁명적 민중운동을 견지하고 있던 수많은 해방신학자들이 교회 내부에 퍼져있을 때였다. 엘살바도르의 상황도 여느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막시즘을 신봉하는 급진 좌파 신부들은 특히 로메로의 임명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메로의 인생은 공교롭게도 1977년을 기점으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진보적인 예수회 사제이자 로메로의 친구였던 루띨리오 그란데(Rutilio Grande)는 빈민들 사이에서 직접 활동하며 그들을 위해 투쟁하던 신부였다. 빈민구제를 위해 헌신을 다하던 그는 1977년 3월 12일 괴한의 무리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된다. 루띨리오의 죽음은 로메로에게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로메로는 후에 루띨리오 죽음이 얼마나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회고하며, "만약 그들이 루띨리오가 하던 일 때문에 그를 죽였다면, 나 또한 그와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여하튼 1977년 이전에는 상당히 보수적인 사제로 평가받던 로메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상당히 바꾸게 된다. 그는 즉각적으로 루띨리오의 죽음에 대해 조사할 것을 엘살바도르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정부에 의해 철저히 묵살되었고, 당시 엄청난 검열을 받고 있던 언론마저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였다. 로메로는 이후 전통적으로 엘살바도르 교회가 가진 자들의 비호 기관으로 운영되던 관행을 없애고 좀 더 민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1979년 엘살바도르의 우익 민병대와 암살단들이 수많은 인권침해와 폭력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엘살바도르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로메로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무엇보다 엘살바도르의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원인이 미국의 군사원조에 있다고 보고 당시 지미카터 미 대통령에게 경고 서한을 보내었다. 그는 편지에서 미국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많은 군사원조금이 수많은 엘살바도르 민중을 탄압하고 인권을 침해하는데 활용되고 있으므로, 당장 원조를 중단해야 함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로메로의 경고 서한을 무시했으며, 엘살바도르가 '또 하나의 니카라과'가 될 수 있다는 명분하에 계속적인 군사지원을 강행하였다. 이후로도 로메로 신부는 엘살바도르의 인권침해와 국가폭력에 대해 비난의 수위를 높여갔다. 그는 빈민들을 위해 운동하던 교회 사제들의 구속기소에 반대 하였으며, 국가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암살과 실종, 인권침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종교인의 범주를 넘어선 부분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라디오 방송 설교였다. 그는 일주일마다 엘살바도르 전역에 걸쳐 방송되는 라디오 방송을 실시했으며, 그 방송에서 실종자들과 고문자들, 살인자들에 대해 말하며 엘살바도르 정국에 대해 심도 깊은 설교를 하였다. 마틴 루터 킹과 마하트마 간디의 설교와 나란히 놓이는 그의 강론은 전국으로 중계되었고, 월드컵 축구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청취율을 기록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로메로 신부의 활동은 엘살바도르 군부 및 우익 집단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게 되었으며, 그의 활동을 영원히 중지시켜야 한다는 기운이 돌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로메로 신부에 대한 암살 위협이 공공연하게 시도되었다. 1980년 3월 24일, 로메로 대주교는 산살바도르 '신의 섭리' 병원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극우 군부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으며 자신의 커다란 인생의 방향을 바꾼지 3년 째 되던 해였다. 전 세계는 곧바로 로메로 대주교 암살과 관련해 엘살바도르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엘살바도르 정부는 암살자의 체포와 사건 조사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1980년 3월 30일, 산살바도르 대성당 앞에는 로메로 대주교의 장례식이 전 세계에서 몰려든 250,000명의 인파와 함께 치루어졌다. 이 당시 참석자들은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플랜카드와 사진을 들고 나와 침묵시위를 벌였고, 이에 엘살바도르 군부는 연막탄과 총기 난사를 통한 진압 작전을 실시하여 시민과 기자 등 약 30-50여 명이 사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 이후 엘살바도르 정국은 급격히 얼어붙었고, 내전 또한 더욱 격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교인으로서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던 로메로 대주교의 일생은 사망 이후에 많은 영화 및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 1986년 올리버 스톤 감독에 의해 제작된 영화 '살바도르'는 엘살바도르 내전의 참상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 중 로메로 대주교의 암살 장면이 등장한다. 또한 1993년 존 듀이건 감독은 로메로 대주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로메로'를 제작하였다. 한국인들에게 로메로 대주교는 1988년 국내 개봉하였던 영화 '살바도르'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 역시 군사정권 지하 하에 있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진실규명 되지 않은 상태라 영화를 통해 엘살바도르의 실상을 보며 한국의 상황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2013년 엘살바도르는 일찌감치 내전을 종식하고, 내전 당시 무장게릴라 집단이었던 FMLN이 수권 정당으로 탈바꿈해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엘살바도르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으며, 새로운 발전을 위한 희망을 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엘살바도르 발전의 가능성 밑에는 로메로 대주교의 크나큰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을 전 세계인들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저는 자주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를 죽일 때 저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흘린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이 곧 실현되리라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사제는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인 민중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로메로 대주교 사진)>
(영화 살바도르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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