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5:50:03 조회수 : 1,768
국가 : 니카라과

 
임상래(부산외대 스페인어과 교수)
니카라과 현대사는 중앙아메리카의 모든 국가가 겪은 혼란의 내란사를 대변하며 동시에 격변의 라틴아메리카 정치사를 상징한다. 니카라과는 독립 이후 정말 긴 기간 동안 자유와 보수파간의 처절한 내전을 겪었고 거기에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개입을 농밀하게 경험한 나라이다. 또 쿠바혁명에 이어 반미와 반독재를 내세운 산디니스타 혁명이 성공한 나라이기에 라틴아메리카 정치변혁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니카라과 현대사의 심장부에 산디노라는 혁명전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는 외세에 기생하는 무능한 과두제 정부에 대항하여 자유의 깃발을 죽음으로 드높였던 영웅이었고 또 사후에는 그를 기려 탄생한 산디니스타 혁명군이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을 성공시키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결국 게릴라 지도자 산디노는 니카라과 현대사를 살아서는 투쟁으로 그리고 죽어서는 상징으로 웅변했던 인물이었다.

  산디노(Augusto Calderón Sandino)는 1895년 5월 18일 마사야주의 작은 마을 니끼노오모에서 태어났다. 서자로서 태어난 산디노는 집안에서 이복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그의 아버지가 농장과 상점을 가진 상인이어서 비교적 순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그가 왜곡된 사회 현실에 눈을 뜬 건 17세 되던 1912년이었다. 이때는 보수파 정부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운동이 확산되어 이를 빌미로 미군이 니카라과에 개입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기실 니카라과에 대한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의 식민통치는 물론이고 독립 이후에도 니카라과에 대한 서구의
  개입은 그치지 않았다. 이는 니카라과가 가진 지리적 전략성 때문이었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니카라과는 다른 중미나라들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경로였다. 니카라과의 주요 강들은 중부 산악지대에서 시작되는데 서쪽으로는 태평양이나 마나과 호, 니카라과 호로 흘러들며 동부의 강들은 카리브해로 이어지거나 니카라과 호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중미에 길게 누워 마나과와 니카라과 두 호수로 카리브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자연 지형을 가진 니카라과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두말한 나위가 없었다. 이는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카리브 연안을 지배하려는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팽창주의 전략에서도 니카라과는 관심과 개입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개입에 저항하는 반미투쟁은 산디노의 고향에서도 전개되었지만 정부와 미군의 강경 진압으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때 청년 산디노는 외세와 독재로 인한 부정의에 대한 저항의식을 최초로 갖게 되었다. 이후 공장과 농장의 평범한 노동자로 일하던 산디노의 의식을 일깨운 두 번째 계기는 멕시코 이주였다. 그는 1923년 멕시코의 석유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 멕시코에서의 체류는 개혁적인 정치사상과 사회혁명 등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멕시코는 1910년 혁명의 영향으로 다양한 정치 이념들이 충만한 곳이었다.

 

 
  1926년 자유파와 보수파간의 내란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고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미군은 다시 니카라과에 상륙했다. 이전부터 조국이 외세에 유린되는 상황에서 자신만이 멕시코에서 안락한 삶을 누린다는 죄책감에 고민해 왔던 산디노는 결국 귀국을 결심하였다. 그는 로마의 시저(César) 황제처럼 용감하게 미국에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으로 세사르 산디노(Augusto César Sandino)로 이름을 바꾸고 광산 노동자들과 함께 자유주의 헌정파에 가담하여 반미투쟁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산디노의 투쟁은 이듬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왜냐면, 1927년 자유파는 산디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보수파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기 때문이었다. 산디노는 이 평화협약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중단 없는 반미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포하고 투쟁을 지도하였다.
 
 
  산디노에게 갖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으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미군의 공세에 맞서 그는 치열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산디노 군대의 게릴라전술은 산악지형을 이용한 부대별 매복공격과 소도시의 정부군 기지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그들은 지체 없이 그들만이 아는 지름길로 퇴각했다. 폭우와 하천의 범람, 모기와 맹수의 공격, 습기와 열병의 공포 등도 산디노의 후원군이었다. 산디노 군대는 그 지역 농민들의 참여로 조직되었다. 따라서 산디노군은 전투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산디노 투쟁의 승리를 담보해주었다.

  산디노군의 병력은 초기에는 2천명 정도였으나 무장활동이 가장 강화되었던 1931-32년에는 6천명까지 늘어났다. 미군의 희생이 증가하면서 미국 내에서 서서히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또 당시 미국은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경기침제로 니카라과 개입에 대해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1933년 니카라과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니카라과에서 철수하였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반미투쟁사에서 유례가 없었던 위대한 승리였다. 미군의 철수는 미국 국내 사정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산디노가 주도한 치열한 반미투쟁의 성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물러났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정부와 산디노간에는 산디노군의 무장해제와 사면 문제가 남아있었다. 양측간의 합의가 있었지만 이는 국가방위대의 공격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산디노군과 맞서 싸워온 국가방위대의 소모사는 국가방위대를 사유화하는 등 정치적 야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산디노를 두려운 정적으로 여기고 그를 제거하려 많은 애를 썼다. 결국 산디노는 1934년 2월 소모사의 비열한 계획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는 산디노 투쟁의 일단락을 의미하는 동시에 소모사 장기 독재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보잘것없는 소총만으로 무장한 채 굶주림과 공포에도 굴하지 않았던 농민 전사들의 투쟁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위해선 산디니즘(sandinism)의 이념적 토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산디노는 매우 영적이고 종교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혁명투쟁에서 종교적, 도덕적, 윤리적 해방을 추구했다. 그는 정치와 종교는 유관하며 투쟁과 전투에서 신과 예수를 신봉했다. 그는 성령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물 아홉 사도를 보냈는데 이 사도들은 자신의 농민군에 재림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는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재림한 혁명가’라고 주장했다.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은 유럽보다는 멕시코 혁명의 무정부노조주의에서 영향 받은 듯 하며 또 멕시코 혁명의 민족-인종주의적 성격을 존중하여 이것을 니카라과 현실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했다. 즉 그의 애국사상은 인종과 계급에 기초한 조합물이었다. 특히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는 진정한 애국자가 되게 만드는 신비스러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내 몸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자긍심을 갖는다”라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는 원주민 문제에 대해서 주체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산디노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이상-낭만주의이다. 불리한 줄 알면서도 위험천만한 투쟁을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영웅이며 순교자였다. 온갖 특혜와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자서 미군과 정부군에 싸움을 거는 어리석은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은 이들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미국의 야만성을 알리는데 매우 중요하기에 이 ‘어리석고 작은 군대 pequeño ejército loco’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산디노 역시 “처음부터 승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국 패할 것이란 것을 알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기보다는 모범과 희생에 자신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신념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산디노가 추구했던 이상과 목표는 ‘조국과 자유(Patria y Libertad)’였다. 이는 사파타에게 혁명이 토지와 자유를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산디노에게 투쟁은 외세에 종속된 조국에 자유를 되찾아 주는 것이었다. 진정한 조국을 되찾고 그럼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가 줄기차게 요구했던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산디노의 투쟁은 승산만으로 볼 때 ‘바보’같은 짓이었다. 아메리카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자 하는 신흥 강국 미국과 오랜 기간 동안 니카라과를 지배해왔던 과두 정치에 소수의 농민게릴라로서 대항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엇다. 그러나 그는 부정의에 항거하여 총을 들고 있어선 투사였고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결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은 원칙주의자였다. 또 그는 투쟁 없이는 어떠한 자유도 얻을 수 없다는 신념을 보여준 행동가였다. 특히 산디노는 빈곤과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니카라과 국민들에게 밤이 지나면 자유의 새벽이 온다는 희망을 전해주고 훗날의 니카라과 혁명을 예고한 혁명의 선지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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