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서성철 | 작성일 : 2014-04-26 04:30:09 | 조회수 : 2,340 |
국가 : 쿠바 | 언어 : 한국어 | |
구분 : 인물평 | ||
헤로니모 임 선생에 대한 추억
서성철(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기억의 언저리에서 잊혀졌다가 헤로니모 임(한국명 임은조) 선생을 다시 해후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우연히 지난 신문을 정리하다가 헤로니모 임 선생의 손녀가 되는(엄밀히 말하자면 헤로니모 임 선생의 남동생의 손녀) 아사리아 임의 기사를 보고서였다. 이 스무 한살의 쿠바 처녀가 한남대학교에 유학을 와서 지금 한국에 있다는 것이었다. 수소문해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고 그녀와 통화를 하게 된 것이 최근의 일이다. 우선 헤로니모 선생의 안부를 물었고, 동생인 마르타 선생은 어떻게 지내는지, 가족 관계 등등의 안부를 물었었다. 이제 그동안 헤로니모 임 선생 가족과의 끊어진 인연을 손녀인 아리시아 임을 통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생각해보니까 필자와 헤로니모 선생과의 인연이 그리 짧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필자가 재외동포재단에 근무할 때 헤로니모 선생을 초청해 서울에서 뵌 적이 있고, 또 필자가 2003년,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쿠바에 갔을 때, 그리고 멕시코 이민 백주년을 기념해서 멕시코 메리다에서 다시 만난 적이 있다.
사실 헤로니모 선생은 한국에서는 유명한 사람이다. 한국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었고 쿠바 한인이민을 이야기할 때면 늘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헤로니모 선생의 이력을 잠깐 훑어보면 18살 때인 1940년대 마탄사스 대학생이었던 시절, 바티스타 독재자의 부패와 학정에 반기를 들고 학생운동에 처음으로 나서게 되고 다시 아바나 대학으로 적을 옮기면서부터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에 나서게 된다. 필자는 헤로니모 선생이 체포되어 경찰차에서 내리는 광경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그것이 아바나에서였는지 아니면 헤로니모 임 선생의 고향이신 마탄사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시아 동양인 얼굴을 한 청년이 반독재투쟁을 하다가 쿠바 경찰에 잡혀 가는 선생의 모습은 묘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물론 체 게바라가 1967년 볼리비아로 들어가 무장 게릴라 운동을 펼쳤을 때 그 일원 중에 쿠바 중국이민 후손도 있었지만... 헤로니모 선생과 카스트로가 아바나 법대에 같이 다닌 것은 맞지만 둘 사이에 커다란 교류나 개인적인 접촉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 필자는 헤로니모 선생을 여러 번 접하면서도 선생의 신상에 대해서는 세세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특히, 쿠바 한인지도자로서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온 선생에게 혁명정부에서의 활동 상황에 대한 질문을 피한 것은 나름대로 선생을 배려한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후회가 되는 대목이다. 아무튼 선생은 여러 이유로, 아마도 가정 형편상 아바나 대학을 중도에 그만 두고 카스트로의 유명한 7.26일 운동에 합류하셨다고 하는데 아마도 헤로니모 선생이 도시에 남아 지하투쟁을 하지 않고 시에라 마에스트라까지 가서 게릴라 운동에 합류했다면 선생의 명성이나 평가는 또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후 선생은 그동안의 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쿠바 혁명정부에서 한국인 이민후손으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여러 요직을 거친다. 경찰청에서 잠시 일했고, 산업부로 자리를 옮겨 오랫동안 경제 관련 일을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아바나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키테라스 시 시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치게 된다.
- 헤로니모 임과 부인인 크리스티나 장(출처: 프레시안 2005)
필자는 2003년 여름, 선생을 아바나에서 처음 뵈었는데 그때 선생은 1960년대 옛 소련제 프라다 차를 끌고 나오셨다. 그 차는 선생의 그동안의 봉직과 노고를 생각해 쿠바 정부가 선생에 베푼 일종의 특혜로서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한다. 선생은 연금만 가지고는 생활이 어려워 한동안 이 차로 택시운전을 하면서 살아가셨고 나이가 들면서 택시를 모는 것이 힘들어지자 남에게 빌려주고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로 생계에 보탰다고 한다. 이 구닥다리 고물차를 선생이 직접 운전하시면서 한인들이 최초로 거주했던 엘볼로 농장, 에네켄 밭, 아바나 시내, 그리고 아직도 한인후손들이 많이 거주하는 마탄사스, 카르데나스 등을 안내해 주셨다.
그런데 헤로니모 선생을 이야기할 때 늘 빠질 수 없는 분이 아버님이신 임천택 선생이시다. 1905년, 천여명의 한국인들이 먼 멕시코 유카탄에서 에네켄 일을 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이다. 1921년 288명의 한국인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갔었다. 사탕수수 자르는 일이 더 쉽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희망으로 쿠바에 갔지만 결국 당시 설탕 가격의 하락으로 그들은 쿠바에서도 에네켄 잎을 자르는 일을 했었다. 지금은 허물어진 건물들만이 남은 엘볼로 농장은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2세 교육과 독립의 씨앗이 싹트고 영근 쿠바 한인이민들에게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임천택 선생은 참으로 대단했던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분이 쿠바 한인사회를 위해서 한 일을 쭉 돌이켜 보면 그렇다. 아마 이분은 쿠바 한인사회의 진정한 지도자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어려운 삶속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고 (이 분의 행위는 훗날 김구의 백범일지에 기록되어 1997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지금 임천택 선생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본인은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아 한글학교인 민성학교, 전성학교를 세우고, 청년들에가 한국 혼을 불러 넣어주기 위해 독서회, 청년단체를 조 만들고 대한국민회 쿠바 지부의 장으로, 그리고 부인회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하는 등 한인사회와 관련하여 이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1942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적국인 일본인으로 오해받지 않고 연합국 편에 선다는 표시로 태극기와 쿠바, 미국기를 들고 아바나 시내를 행진하는 사진을 보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임천택 선생은 자기 자식들의 교육을 잘 시킨 분이다. 헤로니모 선생은 한국이민 사회 최초로 대학에 들어간 분이다. 이때 쿠바 거주 동포들이 돈을 모아 입학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여동생인 마르타(한국명 임은희) 역시 마탄사스 대학에서 오랫동안 철학교수로 재직하였고, 몸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날렵하지만 여걸 같은 이 분 역시 오빠 못지않게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해 온 분이다. 무학인 아버지 임천택 선생이 "큐바 이민사'를 써서 우리에게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듯이 딸인 마르타 임 역시 인류학 교수인 남편과 함께 1971년에 『쿠바의 한인들』(Coreanos en Cuba)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쿠바의 한인 이민사뿐만 아니라 멕시코 에네켄 한인 이민의 실상을 잘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003년 10월, 재외동포재단에서는 매년 시행하는 프로그램으로 해외유공자 초청사업이 있었는데 이때 선생은 우리정부의 초청을 받아 필자는 서울에서 선생과 감격의 해후를 할 수 있었다. 선생의 방문은 초행은 아니었고 이미 1997년에 아버지 임천택 선생의 애국훈장 수여식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것뿐이랴! 선생은 1967년에는 북한까지 방문한 경험이 있다. 당시 선생하고 이런저런 담소를 하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선생은 필자에게 자기 아들인 넬손 임이 한국에서 공부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을 피력하시면서 간곡한 부탁을 하셨다. 나중에 한국과 쿠바가 외교관계가 수립될 때 아들이 한국대사관 같은 곳에 근무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말끝에 흘리셨다. 당시 재외동포재단 교육부에서는 재외동포 대학생 초청 석박사 코스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당시 오리엔테주 대학 경제학 교수였던 넬손 임은 나이 제한에도 걸리고(아마 마흔 살이 넘었나 그랬다), 모든 조건이 맞지 않았지만 넬솜 임은 특별 케이스로 한국에 들어왔고(국교가 없고 특히 사회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의 초청이 얼마나 어려웠던지는 여기서 언급 안하기로 한다), 경희대학교에서 한국어 코스를 한 일년 남짓 배우고 본 과정 들어가기 전에 다시 쿠바로 돌아갔다.
돌이켜 보니까 헤로니모 임 선생의 가족들은 독립 유공자인 아버지 임천택 선생의 덕분으로 또 이 가족이 한인사회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여러 형제들이 한국을 방문했었다. 임천택 선생의 셋쨰 딸인 이르마 임은 아버지 유해가 현충원에 안장될 때 한국에 온 적 있고, 첫째 딸인 마르타 임 선생도 1997년 한국을 방문했으며, 헤로니모 선생, 아들인 넬손 임, 그리고 임천택 선생의 증손녀인 최근의 아리시아 임까지 합하면 이 가족은 쿠바 한인 이민후손들의 어려운 처지와 비교해 볼 때 확실히 큰 혜택을 받았음에는 틀림없다. 두 번의 쿠바 방문을 통해서 필자는 우리 한인 이민후손들이 많이 거주하는 마탄사스, 카르데나스 등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도 허름하고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헤로니모 선생 가족이야 그만한 자격이 있고 또 그럴만한 여유가 충분히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필자의 눈에는 여전히 힘들게 살아가는 다른 한인 이민후손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헤로니모 선생을 또다시 뵙게 된 것은 2005년 3월, 멕시코 메리다에서였다 유카탄 주의 수도인 메리다에서는 그때 멕시코 한인이민백주년을 기념한 행사가 치러지고 있었는데 필자는 재외동포재단 이광규 이사장과 함께 메리다에 가서 쿠바 한인이민 대표 20명을 이끌고 메리다에 오신 선생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민 행사가 끝나고 선생이 다시 쿠바로 돌아가기 전날, 같이 온 일행 중의 40대 아줌마 하나가 사라졌는데 당시 들었던 이야기로는 이 분의 친척이 마이애미에 있는데 미국으로 가려고 숙소를 빠져나와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혹시나 선생이 쿠바에 돌아가 어떤 불이익이나 당하지 않을까 선생의 안위에 대해서 조금 걱정은 했었는데 며칠 후 쿠바 아바나 공항에서 선생의 반가운 모습을 보니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구나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이 분은 이광규 이사장과 필자가 멀리서 왔다고 손수 이전에 나한테 해주었던 그대로 안내를 또 한번 해주셨다. 선생을 지금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건장하고 강인한 인상으로 남아있는데 이분이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그때는 몰랐지만 이분이 1926년생이니 2005년 마지막 쿠바에서 뵈었을 때의 이분 나이는 한국 나이로 80세셨던 것이다.
이후 필자가 해외생활을 하면서 헤로니모 선생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고 선생이 2008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아버지인 임천택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헤로니모 임 선생 역시 뿔뿔이 흩어진 한인회의 재건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한글학교를 세우고 한국문화를 보급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신 분이다. 사실 쿠바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어 친한국적인 한인회를 쿠바에서 재조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마 이 부분에서 선생은 많이 좌절하셨을 것이다. 아무튼 헤로니모 선생이 없는 지금 누가 그를 이어 이런 어려운 일을 해나갈 수 있을까? 넬손 임, 아니면 이 예쁘장한 손녀인 아사리아 임? 괜한 걱정도 해보지만 여러 한계와 어려움 속에서도 쿠바 한인사회는 존속할 것이고 또 누군가가 나타나 그들의 선조나 선배들이 해왔던 일을 계속할 것이다.
12월 초,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아사리아 임은 겨울방학 때 쿠바에 갔다 올 예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메일 주소를 서로 교환하면서 다시 연락하자고 다짐했다. 이 4세 코레아나가 한국에 돌아오면 구아바나 이야기, 말레콘 해변, 엘볼로 농장, 헤로니모 할아버지의 임종 모습과 선생의 아내로 아직 살아 계신 크리스타 장, 그리고 마르타 할머니의 근황, 쿠바의 코레아노 한인 이민 후손들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면서 쿠바에 남겨둔 내 추억도 다시 회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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